킹박
평소 이 사람 저 사람들이 매체에 나와서 그들 주변 얘기를 하는데, 자연스레 그들끼리의 서열관계 친목관계에 대해 어렴풋하게 짐작을 하곤 한다. 누구 얘길 듣다가 평소 궁금했던 서열을 정리해 봤다. 그들끼리의 애증관계가 조금은 정리되는 듯하다.
1931 이봉조
1937 이종환
1938 신중현, 자니 리, 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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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조영남
1947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박인수
1948 한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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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조용필
1951 정훈희, 김민기, 김추자
1952 양희은
대중가요사에서 소위 트로트 세대를 건너뛰고 나면, 포크 로크 등 미국노래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시대가 등장한다. 전설의 시대에 해당하는 이 분들의 생년을 찾아 적어봤다. 30년대생, 40년대생, 50년대생, 적어놓고 보니 이들의 공통점은 일제 강점기부터 6.25 전쟁 시기까지 모두 민족의 환란과 함께 한 시대에 출생했다는 것이다.
이 연표를 보면, 이들에게 왜 이종환이 떠받들어지는 인물인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이종환은 쉘부르를 운영하며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게 해 주었고, 마이크를 잡으면서 방송에 출연시켜 주어서 가수들에게 명성과 인기를 가져다주었고 그들을 먹여 살렸다. 김정호, 어니언스, 석찬, 이영식, 이수만, 남궁옥분, 유익종, 이문세 등이 모두 그가 배출한 가수들이다.
일종의 연예 기획 1세대였던 것이다. 이종환이 선의와 밥벌이를 겸했다면 이걸 본격적으로 상업화시킨 사람이 박성배다. 유니버설, 서라벌 레코드를 운영하기도 한 그는 킹레코드를 설립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가수(신중현 사단에서부터 시작해서 송창식, 박인수, 조용필, 김민기, 양희은, 강산에까지)를 스타로 만들었다. 60년대 빽판을 불법으로 제작해서 돈을 번 박성배는 업계에서 ‘킹박’이라고 불릴 정도로 성공했다. 그러나 박성배의 삶은 비극적이었다. 자기가 배출한 가수에게 돈을 한 푼도 줘본 적이 없다는 그는 90년대 들어 파주에 아시아 최고의 음반사를 설립한다는 꿈을 실현시키고자 과감한 투자를 했지만, 이미 세상은 CD의 등장으로 음반 사업이 이미 사양길이었다. 가수를 보는 안목은 탁월했을지 몰라도 시대의 흐름에는 민감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불행은 그 자신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회사가 부도나자 SK와 예전미디어에 판권을 넘긴 박성배는 미국으로 도주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인이 쓰러져 사망했고, 어머니 장례를 치르기 윌해 미국에 있던 아들이 귀국했으나 병역법 위반으로 출국하지 못하고 강제 징집되어 방위병 근무 중 탈영하여 사망했다. 업이라는 게 있다면, 악업의 결과를 제대로 당한 집안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핀다고 했던가, 시절이 혹독할수록 아름다운 것들은 더 찬란하게 빛이 나는 법이다. 흑백의 명암은 극명하게 대조될수록 서로를 선명하게 비춰준다. 빛났던 무대와 그 뒤편의 어둠 속을 들여다보면, 이 두 세계는 서로 얽혀 함께 돌아가는 힘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박성배가 미국에서 노숙자로 전전하며 중풍으로 쓰러졌을 때, 이장희와 양희은이 유일한 조력자였다. 매스컴을 통해 한국에 도움의 손길을 뻗었지만 모두가 외면한 인생이었다. 양희은이 결국 미국자택에서 그를 씻기고 돌봤다. 양희은의 음반을 내주고 죽도록 긁어먹고 결국 양희은의 남은 자산마저 최후까지 말아먹은 박성배였다.
어찌 보면 더럽게 사는 게 깨끗하게 사는 것보다 백배는 더 힘들 수 있다. 무슨 지조라도 지키는 것처럼 시종일관 변치 않고 그렇게 살긴 불가하기 때문이다. 악당에게도 지조가 있다면 그것은 곤조일 것이다. 지조와 곤조가 한 끗 차이의 말장난 같은 단어처럼 보이지만, 선과 악이 한 덩어리로 어우러진 우리 같은 범인들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그들은 너무 먼 데서 살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안 살려면 더럽게 망해버리면 그만이지만, 살려면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