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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Sep 21. 2024

어느 가족

한 개의 성만 살아남는 생존 게임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가족을 인식하는 방식은 가족 내부에서 새 나오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질문을 통해 문제를 진단하고 개념을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질문 하나하나는 작은 나사가 되어 기성의 조립된 가족이라는 구조물의 나사를 하나씩 풀었다가 다시 조립하는 가족 해체-재구성(de-reconstruction)의 과정을 보여 준다.     


가족은 타연(他緣)의 이익집단이다.

  퇴니스에 의하면, 구성원 간에 사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혈연중심의 공동사회를 가족이라고 부른다.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은 가족의 첫 번째 조건인  혈연과 직결되어 있다. 즉, 이해와 혈연은 상호배타적 개념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족은 비영리적 혈연집단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벌써 문제가 발생한다. 부부는 혈연관계도 아니고, 금전보다 더 절박하고 복잡한 이해관계가 밑바닥을 이루면서 ‘부부는 가족인가’ 하는 점이 대두되는 것이다.

 ‘어느 가족’의 구성원 중 중심축에 해당하는 부부, 오사무와 노부요 역시 혈연이 아닌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그들은 철저히 서로에 대한 필요성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살인공모자들이다. 가장 완전한 이해관계로 가족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부부라는 것이 겉으로는 운명공동체 운운하지만, 운명을 같이 한다는 데에는 재산을 공유한다는 필연적 연결고리가 있다. 부부야말로 철저히 이해관계로 연결된 관계라는 걸 인지한다면 사랑이라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보다, 재산의 축적과 유지관리라는 이해타산의 실리가 이들의 관계를 지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이 이들을 단결하게 하는가

  이들 부부에게는 어머니 같은 할머니 하츠에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하츠에는 집주인이다. 거주지 없는 식구들이 하츠에의 집에 몰려들어 함께 살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집세를 내고 있지는 않다.

  이 집안의 최대의 부양자, 하츠에는 연금수급자다. 오사무 노부요 부부가 은근히 탐내고 있는 수입원이다. 하츠에는 젊은 시절 남편을 뺏어간 여자의 집에 일 년에 한 번, 남편의 기일에 맞춰 찾아가 그 아들 부부로부터 수금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남편을 뺏어간 상간녀에 대한 복수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아들 부부의 장녀, ‘아키’를 데려다 키우고 있다. 아키는 유사성매매업에 종사하며 자신의 가정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일탈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키는 자신과 함께 사는 할머니가 자신의 친할머니 이전의 큰할머니라는 사실도 모르고, 아키의 부모 역시 하츠에가 자신의 장녀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츠에의 범죄행위는 고의적이지 않다(돈도 달라고 해서 받아오는 것이 아니고, 아키도 하츠에가 의도적으로 데리고 들어온 것이 아니다.)는 점에서 스스로 사면의 면죄부를 안전판으로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여전히 변함없는 복수심을 불태우며 살아갈 수 있다. 

  쇼타와 유리는 유기된 아이들이다. 그들이 이 가족에 편입된 이후 배우고 세습되고 있는 것은 도둑질이다. 이 가족이 꾸준하게 생계를 이어 나가는 생존방식이다.

  가족 구성원 모두의 공통점은 범죄자라는 것이고, 이런 행위를 통해 이들은 여느 가족 못지않은 끈끈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혈연이 주는 유대감과 범죄행위가 주는 유대감의 차이, 놀랍게도 구속력은 후자가 더 있다. 이들은 서로에게 책임과 의무를 다하게 만든다. 혈연이 주는 관용과 이해, 추상적인 사랑의 테두리가 결속을 더 느슨하게 한다면 이들의 관계는 더 큰 결속력을 낳는다. 그것이 할머니 하츠에의 죽음에 대한 은폐로 나타난다.

온 가족이 하나 되어 집주인 할머니, 가족의 수장을 마당에 묻고, 부부는 할머니의 재산을 공유하며 아이들을 부양한다. 최상위의 부양의무자가 사라지자, 새로운 부양의무자가 나타난 것이다. 동물의 왕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의 생존방식, 새로운 가장의 등장이다.     


결핍은 사랑을 낳고사랑은 가족을 낳는다.

  아버지를 왜 아버지라 불러야 하는지, 어머니를 왜 어머니로 불러야 하는지, 가족이 왜 가족인지에 대한 물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태생적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홍길동에게만 해당하는 사정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호부호형의 이유를 만들어내고 있다.

  비록 도둑질을 가르쳤지만, 자신의 결핍을 주워온 ‘아이 쇼타’에게서 얻으려는 ‘어른 쇼타’의 부성은 끈질기다. 자신과 같은 존재를 또 하나 만들어 놓으려는 어른 쇼타의 시도는 작명에서부터 시작하여 도둑질 노하우의 전수에까지 그 은근한 애정은 한결같다.

 결핍과 결핍은 채움을 낳고, 그렇게 채워진 것, 혹은 채워지는 것을 인간이라는 동물은 사랑이라고 믿게 된다. 그렇게 서로의 결핍이 만나는 지점에서 아이 쇼타는 어른 쇼타를 향해 ‘아빠’라고 혼잣말을 한다.   

  

시바타하나의 성씨가 지배한다.

  구성원을 채우는 방식은 유괴고, 생존의 방식은 약탈이며, 서로의 관계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들로 이루어진 집단, 가히 초현실적인 범죄집단으로 불릴 만한 이 집단은 다름 아닌 ‘가족’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 가족의 성씨는 놀랍게도 ‘시바타’ 하나다. 시바타는 예전에 떠나고 없는 하츠에 남편의 성씨이다. 죽은 자가 남기고 간 성씨를 타연의 일가가 모두 함께 쓰고 있다.

  우리가 이루고 있는 가족은 모두 죽은 자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가부장과 호주가 살아있고, 이해(利害)를 사랑이라고 포장하는 것이나, 가부장을 전통이라고 포장하는 것이나 모두 기득권자의 폭력적 세습이 살아 있는 세계 경제대국 일본의 민낯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묻는다. 단 한 개의 성을 물려받은 너희들의 가족 중에 이 가족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도둑질(万引き)이라고 원제목에 되어 있는 것은 극 중 내용에 부합하는 사실인 것도 있지만 감독이 현대 일본 사회를 비꼬았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가족을 도둑질해 온다, 핏줄까지도 도둑질해 올 수 있는 시대에 살면서 가족 이념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 기초부터 다시 세우고 싶어 하는 따뜻한 마음이 전해진다. 한국사회의 가족현상에 대해 우리들의 자화상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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