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었다. 정말 마지막까지 내리지 않고 있던 마음의 끝자락이었다. 그와 나 사이에 암막 같은 장막이 내려오며 철문만큼이나 큰 소리로 철컹하고 가슴을 내려앉혔던 날이었다. 그의 마음에 그게 없었다, 셧다운.
겨울, 코트 깃을 세우며 들어선 오뎅바였다. 즐거운 사람들의 소란을 뚫고 안쪽에서 주인의 목청이 반겼다. 대학생처럼 보이는 여종업원이 안내한 자리는 문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통로 끝자리였다. 주방입구 앞이라 주문하기 쉽다는 점이 장점이었지만, 뒤에 쌓아놓은 잡동사니로 그쪽 벽으로 앉을 사람은 자리가 불편할 수도 있었다. 남편을 위해 그쪽 자리는 비워 두었다. 그 자리는 출입문을 바라볼 수 있는 상석이었기 때문이었다.
장내 모든 사람들로부터 등 돌려 앉는다는 건, 감수해야 할 몇 가지를 버텨내야 한다. 첫째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일, 둘째 내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 난 이 두 가지 일에 모두 태연한 편이었다. 타인과의 관계에 연연해하지 않았고, 내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크게 좌우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내 밖의 일을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가 뭐래도 나는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의 선택을 나는 믿었다.
잠시 바깥의 추위에 몸을 떨었고, 자리에 앉으며 두 팔을 모아 몸통을 감쌌다. 나는 추위를 잘 탔다. 몸이 녹기까지 수 분이 걸릴 것 같았다. 아직 외투를 벗을 타임이 아니었고, 종업원이 가져온 따뜻한 오뎅국물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차가운 손가락 끝에 온기가 전해지고, 반사적으로 코끝을 국물이 담긴 컵 위로 가져갔다. 진하고 짭조름한 국물 맛이 느껴지는 냄새가 올라왔다. 아늑한 공간, 느슨하게 피어오르는 오뎅국물이 만든 안개로 주방 안이 희끄무레했다.
꽤 늦은 저녁이었다. 술집으로썬 분위기가 피크에 달한 시점이며 동시에 손님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할 시간대였다. 이를테면, 이브닝과 나이트의 근무교대랄까. 10시가 넘어가고 있었으니까. 이브닝이 끝나기도 전에 나이트근무자와 교대해서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인수인계 할 것도 없었다.
"어제처럼!"
빠르게 인수인계서에 사인하면서 늘 이런 날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나마 수술실은 정해진 루틴이 일정했다. 이제 일 년 돼 가니까, 새로운 일은 더 이상 없고, 스크럽과 서큘 어느 것도 익숙해져 있었다. 근로복지공사에서 근무한 지 8년 만에 종합병원으로 옮겼다. 공단으로 개편한다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내겐 모험이었고 도전이었다. 개편되면 처우가 더 좋아질 것이라 다들 편한 직장 버리고 사서 고생하러 들어간다고들 하였다. 하지만, 사람은 계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 첫 번째로 필요한 조치가 환경을 바꾸는 것에 있었다. 공사에서 8년이 지나도록 변화는 없었고, 지루한 일상과 의료 출장이 반복되었다. 직장 건강검진과 삼척 정선 태백 사북 등의 탄광촌 출장이 그나마 새롭고 긴 오지로의 출장이 신선할 지경이었다.
간혹 대학병원에서도 지원자가 몰렸다. 그럴 때마다 의료사고나 의료 민원인들로부터 발생하는 문제가 사회면 뉴스를 채웠다. 근로 조건이 법으로 보장되고 있는 공무원 생활을 누리던 공사는 그들에게 꿈의 직장이었다. 나 역시 입사 때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들어왔으니까.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선별직이라는 자부심 또한 있어서 근무자들 역시 대개 도도하고 쌀쌀맞은 성격들을 하고 있었다. 특히 대민업무를 맡고 나면 검진 대상자들에게 유난히 딱딱하게 구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저런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일들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일과 사람, 그리고 얽히는 관계에서 오는 불안, 이런 것들을 돌파해 나갈 계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남편이 좀 늦는다는 생각을 하며, 일단 탕을 시켰다. 남편이 좋아하는 모둠, 그리고 청하로 할까 하다가 소주도 한병 미리 시켜놓았다. 난 생맥주 500 한 잔을 주문했다.
"일행이 몇 분 더 오세요?"
"한 명이요."
종업원은 인원수에 맞게 잔을 내오고, 앞 접시와 수저를 배치했다. 겨울인데도 마른 무릎이 드러난 치마를 입고 있는 것이 안쓰럽게 보였다.
등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찰랑찰랑거렸던 종소리가 다시 찰랑거리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렸고, 남편의 발소리가 나무 통로를 따라 곧장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을 귓등으로도 알 수 있었다. 남편의 구두소리는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앞꿈치와 뒤꿈치가 빠른 시간차로 달그락거렸기 때문이었다. 사람과 사람을 식별할 수 있는 수단이 지문과 홍채 외에도 더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발걸음 소리였다.
"일찍 왔네? 내가 빠를 줄 알았는데..."
남편은 앉으며 소주병을 들었다.
"아가씨, 이거 말고, 대포로 한 잔 마시게, 수복 있지? 그거 아예 여기 주전자로 걸어주라고..."
남편은 테이블 위의 소수병을 되가져 가는 여종업원의 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봐. 사람 민망하게."
"누가? 당신이, 아니면 저 아가씨가?"
"둘 다!"
요즘 남편이 부쩍 답이 없는 상태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몇 번 눈에 띄었고, 실제로 그런 말도 몇 번씩 했으므로, 나는 그걸 또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달엔 남편은 연구실 조교를 데리고 나와 술을 마셨고, 퇴근길의 나를 불러 합석하게 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새 얼굴이었다. 아마 조교가 쉽게 교체되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고, 가끔 말하는 뽄새가 좀 당돌하다고 여겼고 몇 마디 거들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들어와 버린 기억이 났다.
그리고 성적인 농담이 부쩍 늘어나기도 했다. 언젠가 '밖에서 한번 하고 오면 안 되냐', ' 내 언젠가는 꼭 하고 온다' 이런 식의 말을 툭툭 던졌고, 그 말 끝에 '그럼 나도 그렇게 해도 되겠네'라는 답을 들은 남편은 일절 그런 쪽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단히 자기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에 각인된 사건이었다.
글을 쓰는 남편을 처음 봤을 때, 뭔가 보통사람과는 다른 큰 그림을 그리며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실제로 그런 면도 있었고, 그런 쪽의 사람들과도 친분을 유지하면서 자기만의 세계를 잘 만들어 나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흔한 남자들과는 다른 남자일 거라는 생각, 그 생각이 나를 연애에 빠뜨렸고 난 그걸 사랑이라는 감정이라고 믿었다.
중탕되고 있는 주전자 뚜껑을 열자 주전자 속에 더운 김이 낮고 차분하게 몰려있는 게 보였다. 남편 앞에 놓인 사기대접에 주전자 주둥이를 기울였다. 한줄기 맑은 줄기가 곱게 잔속을 채웠고, 남편은 사기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손바닥과 손가락들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손가락 끝 마디가 아직도 발갛게 보였다.
"너, 알잖아. 나 거짓말 못하는 거."
거짓말, 그럴지도 몰랐다. 누가 술집여자 집에 가서 자다가 출근했다는 말을 믿어줄까, 그리고 그 술집여자는 여자가 아니고, 남자란 말이야?, 남편은 이해할 수 없는 변명을 해댔다. 한편으론 사실이겠지 하는 태도로 일관했지만, 속으론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여자가, 연구실에서 갈려나간 여러 명의 조교들 중 한명일 수도 있고, 저기 보이는, 진짜 술집의 어린 아가씨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태연하게 웃으며 내 앞에 있는 남편이었다.
나는 정말 궁금했다. 그날밤 남편은 어디서 뭘 했는지 진정으로 알고 싶었다. 최소한 내가 납득이 갈 수 있을 정도의 이해라도 했다면, 내 속에 있는 이 덩어리 같은 물체가 내려갈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내 앞에서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
"그러지 말자, 인간도 동물에 지나지 않아, 그런 걸 내숭 떨며 애써 감추며 젠체하며 살지 말자고..."
남편이 잔을 들어 아직도 거품이 고스란히 덮여있는 생맥주 잔 쪽으로 내밀었다. 나도 잔을 들고 그이 잔에 술잔을 부딪혔다. 짧고 높은 소리가 짤막하게 났다. 이건 마치 우리 부부와 같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차가운 맥주와 뜨거운 정종, 서로 내는 날카로운 부딪침, 그래도 차가운 것, 냉정한 것이 사태를 수습한다. 잔도 커서 끌어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냉정한 마음으로 그를 안고 가야 한다. 문제는 언제까지, 그 시한에서 갈등이 생겼다. 언제까지, 이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을지 나는 나를 끝까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자긴, 자기한테 난 뭐야?"
"마누라지 뭐야?"
"마누라라서 방치해도 되나?"
"방치하다니, 난 당신을 믿어."
남편의 말에 사랑은 없었다. 그의 사고는 마누라라는 말속에 모든 게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의 논리였고, 그가 나를 사랑하는 자신이 쌓아온 문화 속에서의 이미지라이팅이었다. 억지로 요구해서 듣는 말의 부질없음은 나도 잘 알았다. 엎드려 절 받기 형식의 어떤 말은 더욱 나의 자존심을 긁었고, 내 속에서는 이미 허용될 수 없는 대화였다. 이쯤 하기로 하자, 모든 대화는 끊어졌고, 말과 함께 더 이상의 마음도 연결되고 있지 않았다.
"애들은?"
"애들 뭐?"
"다 데리고 가려고."
"좋을 대로 해."
"외롭고 힘들지 않겠어?"
"덕분에 작업에 집중 좀 한다고 생각하지 뭐."
"방학 때마다 올 수 있을 거야."
"그렇게 하면 되지. 떨어져 살면 더 애틋해진다잖아."
아이들 문제도 고민 없이 너무나 쉽고 간단하게 결정을 해버리는 사람, 남편에게 도대체 소중한 사람은 누굴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사람은 없는 듯했다. 자기 자신이 유일한 존재일 듯했다. 남편이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했다면, 나와 애들에 대해 그렇게 쉽게 결정을 내려줬을까? 어쩌면 남편은 진짜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법을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늘, 그를 생각하면 짠한 감정이 안에서부터 차올라왔다.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할 사람, 그렇게 안쓰러운 사람이 남편이었음에도 그는 나와 아이들도 없이 뭘 그렇게 하고 싶은 걸까.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은 지금의 시간을 지워버렸다. 그래서 모든 것이 무의미 졌다. 그 무의미 속에서 나는 하루하루를 버텨야만 했다.
“여보, 나 출장 가, 춘천에 좀 다녀와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