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려있는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앓았던 사랑니가 몸 밖으로 빠져나간, 시원하지만 아주 많이 허전한, 일종의 양가 감정 같은 것이었다. 찬물과 뜨거운 물에 한 쪽 발을 따로 담그고 있는 이상하고 불편한 감정이었다.
오늘은 나이트 근무라는 생각이 언뜻 머릿속을 스쳤다. 늑장을 부리며 좀 더 자도 될 거라는 생각으로 느긋하게 발을 뻗어 이불속에서 게으른 몸을 늘어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순간, 자리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리고 협탁의 핸드폰을 열었다. 9시 30분, 30분 전이었다. 벌써 핸드폰 아래 어플엔문자가 몇 개 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 춘천 세미나, 10시에 역 앞으로 나가 있기로 했었다. 겨우 30분 남았다. 씻고, 옷 차려입고, 화장하고, 대충 시간이 계산되면서, 이게 맞나 싶은 생각으로 금세 후회가 밀려왔다. 어제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오뎅바를 나올 때까지도 남편은 세미나에 대해 아무 것도 묻지 않았고, 언제 오냐고 묻지도 않았다. 공사에 있을 때부터 워낙 직장 건강검진 때문에 지방을 자주 다녔던 터라, 그렇거니 했을 듯도 싶었으나, '이번엔 어디로 행차하시나?', '껄떡대는 닥터 놈도 같이 가시는지?' 등 평소 하던 대로의 장난스러운 말도 없었다.
"잘 들어, 난 널 믿어. 내가 날 믿는 것처럼 널 믿는다구."
남편은 수복 주전자를 다 비울 때까지, 믿음을 앞세워 거짓말을 했다. 그가 평소 입버릇처럼 말하던 '거짓말 못하는 성격'은 자기기만적인 처세에 불과했다. 그의 말은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는 궤변과도 같은 말잔치에 불과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였다.
밤늦게 들어오지 않고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주변에 두런거리는 이야기 소리가 들렸고, 그 목소리 중에 여자목소리도 들렸다. 나는 당연히 누구와 있냐고 물었고, 남편은 집 앞이라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 여자를 바꿔보라는 말에 선뜻 전화를 바꿔줬다.
"아, 저 민경숙이에요. 김교수 옆방에 있는 민경숙교수요."
나는 그 여자에게 혹시 모르니,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고, 여자는 자기 전화번호를 불러주었다. 실없이 술 마시고 실수나 실례를 간혹 하던 남편이었다. 그렇게 단속을 하지 않으면 새벽녘이나 다음날 아침 어떤 날벼락같은 소식을 전해 들을지 몰랐다.갑자기 파출소에서 연락이 온다거나,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는 전화가 온다거나 하는 일이 심심찮게 있던 터라 그런 식으로 나름 남편을 챙기고 있던 차였다.
그리고 열두 시가 넘었고, 한시도 지나 가만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 불통이었다. 꺼놨거나, 어디 팽개쳐져 있는 게 분명했다. 아까 통화했던 그 여자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착신 후 몇번이나 바로 통화가 꺼졌다. 여자는 전화는 받지만 바로 끊어버리는 이상한 행위를 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그 기운을 쏟아부어 받을 때까지 통화를 눌렀다.
"전화 잘못 거셨어요!"
이게 무슨 경우인지 납득되지 않은 채, 끊어진 전화소리가 잔향으로 귀에 맴돌았다. 그리고 남편은 그로부터 2시간이나 더 있다가 귀가했다. 새벽 3시였다. 도대체 5시간 동안 옆방의 교수라는 여자와 무얼 했는지 알 수 없는 행방에 대한 추측으로 밤잠을 못 잤던 기억.
"모르지, 내가 민교수가 그렇게 전화를 받았는지 저렇게 전화를 받았는지 어떻게 아냐고, 나보고 물어보란 말이야? 당신이 전화번호 받았다며? 직접 전화 걸어 물어보면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겠구만!"
도대체 이 둘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 아니면 어디까지 진도가 나간 상태인지, 상상하면 할수록 속을 앓게 되었고, 위장약을 먹을 만큼 속이 쓰리기까지 했다. 무슨 일이 분명 있는데, 본인 입으론 말해선 안 되는 일이었고,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니, 말을 돌리는데 자기 모토에 맞게 말한다는 것이 저렇게 앞뒤 안 맞는 허세에 가득 찬 말들을 일관되게 하는 것으로 밖에 안 보였다. 그냥, 한마디로 말하면 속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집 앞이에요"
이승호였다. 문자를 받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왜 여기까지 왔어요?"
"안 나오실 거 같아서요."
"......"
그 말이 맞았다. 아침에 술이 깨자마자 후회한 나였다. 남편이 코를 골며 자리에 누웠을 때, 나는 욕실에 앉아 이승호에게 문자를 넣었다.
"내일 세미나 같이 가요."
그렇게 정해진 약속이었다. 매년 인사철이 되면 자기 사람을 데리고 가려고, 로비가 심했다. 일 잘하는 간호사, 예의 바른 간호사, 인상이 좋은 간호사, 얼굴이 예쁜 간호사 등으로 나눠져 있는 듯했고, 진료 과목별로 특정 간호사를 원할 때도 있었다. 그것도 경쟁이라고 와중에 꺼리는 인물까지 끼어서로 맞고소하듯 배척하는 상대도 생겼다. 간호사실에서는 누구와 누가 사귀었는데 지금은 파트너가 바뀌었다는 등의 스캔들 가십이 심심찮게 나돌았다. 사모에게 봉투를 받고 애를 지웠다느니, 누군 강남에 살림을 차렸다느니 하는 소문들이 무성했다. 하지만 공사의 특성상 특별히 문제가 없는 한 간호사들은 거의 붙박이로 고정적인 업무에 종사했고, 의사들이 순회하듯 자주 바뀌는 시스템이었다. 페이 닥터의 특성상 때가 되면 개인병원을 차리거나, 종합병원 쪽으로 이직하는 경우가 많았고,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대학병원으로 영전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이동하면서 닥터들은 신변을 정리했다.
이승호는 그렇게 개인병원 차리고 나간 닥터였다. 들리는 소문엔 지방의 준재벌 집안에 장가들었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나돌았다. 그랬던 그였지만 내게는 지극했다. 그가 입사하던 날 강당에서 구부정한 모습으로 인사하던 모습은 순박한 시골청년의 모습이었다. 막 군의관 제대 후 공사에 입사한 사회경험 초년생인 셈이었다. 그때 나는 벌써 5년 차에 접어들고 있었으니, 나름 간호사 5년이면 베테랑에 속했다. 의사를 골탕 먹이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시스템 관리자였기 때문이었다.
이승호를 보면, 사람에게 정성을 다 한다는 표현이 맞겠다. 누가 봐도 그는 내게 잘 했고 아이러니하게도 말없이 직설적이었다. 출장 때면 항상 날 먼저 챙겼고, 검진 버스의 자리도 맡아서 지키고 있었다. 그가 벤츠를 타고 나타났을 때도 늘 옆자리는 내 차지였다. 동료 간호사들은 시기의 눈빛으로 내 옆으로 와서 말했다.
“언니, 애 둘 달린 유부녈 왜 그렇게 따라 다닌대?”
그럴 때마다 난 기겁을 했다. 내게 대놓고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자기네들끼린 벌써 살림을 따로 차렸다는 말이 나고도 남을 판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정색을 하고 진심으로 화를 냈다.
“너희들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이선생님이 그런 인성이 아닌 분인 걸 너희들도 알면서 그러네!“
그렇게 그들의 기세를 꺾어 놓으면, 또 은근히 이렇게 물어오는 애들도 있었다.
”언니, 근데 싫진 않지?“
이정도 되면 그들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을지 말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말을 해대는 그들이었다. 등돌리고 앉아 있으면서 귓등으로 하는 말을 죄다 들을 수 있는 기능을 터득한 것은 바로 이런 간호사들의 세계속에서 존경받으며 우애를 지속할 수 있는 나만의 노하우였다.
이승호가 건강관리과에 배정되어 늘 함께 검진차를 타고 다녔다. 바르고 건강한 젊은이였다. 그는 늘 내 옆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습관과 버릇같은 것들까지 눈에 익어 친숙해진 사가 되었고 그런 친숙함은 나도 자연스럽고 애정어린 관계를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어눌하지만 자기표현은 정확하게 해서 의사표현에 감정을 섞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날씨가 참 좋아요, 안 그래요, 송선생님? 하는 말들은 유리창밖의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다지 잘생긴 얼굴은 아니라, 목소리 때문인가? 하고 속으로 생각했던 적이 많았다. 그만큼 그의 목소리는 낮고 은밀했다.
"송선생님 얼굴이라도 보고 가야겠어서요."
"나 아직 안 씻었는데..."
"그 얼굴이 어디 가나요, 뭐?"
이런 식이었다. 느긋하고 조용하고 은근한 말투, 늘 침착해서 환자가 아픈 소리를 못할 지경이었다.
"그럼 얼굴만 잠깐 보고 가는 거예요? 미안해요."
나는 서둘러 화장을 했다. 침대에서 단번에 일어났으며, 일어나면서 가운을 벗어던지고, 욕실의 샤워기를 틀었다. 물줄기를 맞으며 이를 닦고, 거울을 봤다. 헝클어진 머리가 보였고, 까무잡잡한 전신이 거울에 비쳤다. 어려서부터 까만 피부색 때문에 깜상, 까망, 까망코, 심지어 블랙초코라고까지 불렸다. 세안 크림을 바르고 몇 번 쓱쓱 문질렀다 피부색 때문에 표도 안 날 걸 안다. 샴푸를 하면서 가슴을 한번 쳐다본다. 아직 탄력이 있어 보인다. 허리라인을 타고 힙선까지 연결된 선이 나쁘지 않다. 워낙 마른 체형이라 배도 나오지 않았고, 이 배로 애 둘을 낳았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 만큼 납작하고 탄력 있는 배였다. 벽을 보고 샤워기 물을 차가운 쪽으로 돌렸다. 세차게 찬물이 쏟아졌다. 정수리를 내리치는 물줄기가 목과 어깨, 등을 타고 흘러내려갔다. 정신이 번쩍 들도록 그렇게 잠시 서있었다.
화장대 앞에서 젖은 머리를 말리면서 뒤로 흐트러진 침대가 보였다. 남편이 자고 나간 흔적 그대로였다. 던져 놓은 잠옷과 속옷들이 그가 걸어간 방향에 하나씩 떨어져 있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속속 물기를 닦아 낸 후 드라이로 말리기 시작하면서 속옷에 대한 고민이 일었다.
항상 입을 게 없다는 게 문제였다. 안이나 밖이나 입을 게 없는 문제, 남편은, 늘 그런 나에게 이렇게 응수했다.
"늘 벗고 누웠을 텐데, 입을 게 없다는 게 대수야?"
신혼 때의 그런 호기로운 남편이 좋았다. 없어도 없다는 데 초점을 두지 않았던 시절, 서로만 바라봐도 좋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말이 묘한 충동질을 했다. '늘, 벗고, 누웠다'는 불경스러운 말들이 은근히 나를 자극했다.
장를 열자, 분홍색 박스가 옷더미 속에 감춰져 있는 게 보였다. 아, 그래 이게 있었다, 친구들이 결혼 10년 차라고 선물했던 속옷 세트, 아무렇게나 입을 수 없을 만큼 장식이 많이 달린 호화스런 속옷이었다.
"정혜야, 불태워달래라. 핑크니까 조금만 싸지르면 활활 탈 거야!"
그러면서 깔깔거리고 손뼉을 쳤던 친구들이었다. 선물로 받은 그날부터 장롱 바닥에서 잠자고 았던 속옷이었다. 남편과 나에게 특별한 일이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슬프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의 복잡하고 애매한 거짓말로 일관한 여자관계만 여러 케이스로 쌓여가고 있던 중이었다.
앞 버클로 채워진 브라는 꽃무늬 모양을 전체적으로 수 놓았고, 팬티 역시 전면을 레이스로 덮어 화사한 느낌이 들었다. 안감이 실크로 촉촉하고 시원한 착용감이 들었다. 가슴을 모아보고, 팬티라인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몇 번 밖으로 늘려 평평하게 펴며 아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발뒤꿈치를 들어 올려 힙에 힘을 준 상태에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일자로 죽 뻗은 몸이 거울 안에 서 있었다.
갑자기 뱃속에서부터 뜨끈한 그 무엇이 복받치는 감정이 되어 밀려 올라왔다. 그것은 몸이 말하는 언어와도 같은 것이었다. 아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내가 그를 원하고 있다고, 그의 정성어린 구애에 내 몸이 응답하는 말이었다.
나는 소녀처럼 심장이 뛰었고, 온 몸이 뜨겁게 달궈지는 것처럼 화끈 거렸다. 방금 말린 머리 밑에서부터 땀이 확 올라 와 앞머리카락들이 이마에 올라 붙었다. 웬일이야, 내가, 첫 데이트 가는 애들 같이…
그러면서도 나는 진주를 팬던트 형식으로 붙여 놓은, 세공이 깔끔하고 정교한 금목걸이를 걸었고, 목걸이와 한 세트로 구매했던 귓볼에 달라 붙는 진주를 양쪽 귀에 붙였다. 집안 행사나 중요한 모임 때, 일년에 몇번 하지 않는 특별한 액세서리들이었다. 팔찌까지 차보고 이건 너무 과하다 싶어 팔찌는 다시 넣어 두고 거울을 보았다. 싫다면서도 끌려가는 것이 여자라더니, 지금 내가 꼭 그런 꼴이었다.
무릎을 살짝 덮을 만큼의 길이에 맞는 굵은 올로 짠 에이라인 니트 치마에 목선을 타고 턱을 받쳐주는 역시 굵은 올의 폴라를 꺼내 입었다. 체크가 살짝 보이는 버버리를 걸쳐보고 이내 벗어버렸다. 아줌마 태가 너무 났고, 무엇보다 너무 반듯하게 보여서 싫었다.
니트를 받쳐 입어서 같은 패브릭 종류를 걸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니트 실 올 사이를 파고 들더라도 열어젖힌 앞섶으로 옷자락이 감싸듯 날릴수 있도록 얇은 천소재의 롱 코트를 꺼내 입었다. 허리띠는 양쪽 주머니에 구겨 넣고 거울을 쳐다 보았다. 원색의 패브릭 외투가 눈에 확 들어왔다. 사람들 속에서 심하게 튀지 않을까 걱정이 됐지만 이걸 입기로 했다. 충분히 도발적인 아가씨 같은 여자가 거울 속에서 웃고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안 내려 오시면 제가 올라 갈게요."
이승호의 문자가 나를 도발했고,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그 틈으로 신발을 끼워 넣었고, 굽 높은 빨간 힐을 신고 거실을 지나 침실로 돌아 왔다. 젖혀진 커튼을 다시 치고 불을 껐다. 널린 옷들을 주워 옷장 속에 구겨 넣고 방을 정리했다. 그리고 협탁 옆에 놓인 사이드 체어에 숨죽여 앉아 복도에서부터 그의 발소리가 들려 오기를 기다렸다.
“올테면 올라 와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