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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Sep 30. 2024

말할 수 없는, 남자의 비밀 2

  단지, 살짝 흘러넘치는 거품을 머금은 글라스 맥주 한 잔이 간절했을 뿐이었다. 손끝을 시리게 하는 것을 시작으로 혀를 온통 차갑게 적셔놓고 입속을 신선한 온도로 유지하면서 목젖을 싸하게 타고 넘어올 그것, 내 바깥의 후텁텁하고 찐득한 공기가 더 이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목구멍에서부터 위장이 시작되는 통로까지 얼얼한 냉기로 바깥공기를 차단시켜 줄, 차갑고 신선한 향을 가진 빨간색의 맥주 한 잔, 벨기에산 람빅은 아니라 하더라도 체코산 코젤만 되어도 황홀할 지경이었다. 딱 그만큼만, 나는 간절했을 뿐이었다.

  작은 카페 안은 손님들로 빈자리가 없었다. 카페입구에 서자, 가운데 오른쪽 자리에 앉은 여성이 가슴께로 손을 들어 올렸다. 깨끗하고 유순한 인상을 풍겼다. 자리에 앉자 살짝 웃어 주는 입술이 붉었다. 


  "제시간에 오셨네요."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용케도 시간이 딱 맞아떨어졌다. 어색해지는 순간, 의자 등받이에 등을 대고 상체를 뉘면서 오른 다리를 왼 다리 무릎 위로 올렸다. 여자가 테이블 위의 빨간색 던힐 담뱃갑을 내게로 밀어주었다. 담뱃갑 하드 케이스 위에는 금장 라이터가 빛을 머금고 있었다. 


  "안 오실 줄 알았어요."

  "근데 누구신지...?"

  "참, 이런 만남은 이렇게 공개적인 퍼블릭한 장소가 좋아요."


  차분한 생머리를 빗어 내린 여자는 나보다 많이 젊어 보였다. 30대 초반 정도의 나이에, 아래위 투피스로 정장을 차려 입어 전문직종의 여자로 보였다. 나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 차려입고 나올 법은 없으니...


  "여기..."


  명함이었다. 회사이름이 가운데 적혀있고, 변영주, 통역 번역이라고 쓰인 걸 보니, 내 예상이 맞았다. 


  "예, 전 명함을 차에 두고 와서..."


  거짓말이었다. 초면에 명함을 줄 일은 아니었다. 명함 한 장에 상대를 믿는 건 신용사회에서 카드를 내미는 것과 같은 짓이었다. 현대사회에서 일상의 신용은 모두 언젠가 갚아야 할 빚이었고, 갚지 못하면 파산이었다.


  "프로필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을게요."


  손님으로 만석이 된 카페 안이 시끄러운 틈 사이로 종업원이 주문한 아이스티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거품 담긴 코젤만큼은 못하겠지만, 차가운 물방울이 송글 송글 맺힌 유리잔을 잡고 플라스틱 빨대로 얼음을 몇 번 저어준 다음 빨대를 뽑아 버리고 달달하고 순한 아이스티를 목을 꺾어 반쯤 들이켰다.


  "목이 많이 타셨나 봐요."

  "쌔한 맥주가 당겼거든요."

  "차는 잘 빠지던가요?"

  "뭐 평소보다 좀 일찍 나와 서 그런지..."

  "이런 만남은 처음이신가 봐요?"

  "그럼 자주 이렇게 만나세요?"


  여자는 박수를 치며 깔깔댔다. 그렇지만, 노련하게 눈을 내리깔고 낮은 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을 두 번 하겠어요? 저도 가슴이 떨려요."


  긴장과 이완을 자유자재로 하는 여자였다. 나 역시 그녀의 변화에 반응하고 있었고, 웃으면 따라 웃고, 정색하는 분위기에선 진지하게 따라붙었다. 서로 무슨 말을 했는지 벌써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 걸, 옆 테이블의 아가씨들이 '야, 벌써 7시야, 시작할 시간 다 됐다, 들어가자.' 하는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귀여운 눈매와 도톰한 입술이 아이 같으면서도 완숙한 태가 났다. 아마도 차분하게 내려 빗은 단발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그녀의 체형이었다. 동글동글한 체형으로 그다지 크지 않은 키였는데도 전체적으로 스타일시하게 보였다. 그리고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는 대화는 내 페이스와도 잘 맞았다. 내가 멈춘 순간 그녀가 말을 이었고, 그녀가 멈춘 순간 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금세 친밀해진 것을 느꼈다. 

  그러고도 30분을 더 앉아 있었고, 여자는 집에 아이가 올 시간이라고 했다. 세 살짜리 여자 아이를 시부모가 돌봐주고 있다고 했다. 일이 있을 남편이 퇴근하면서 데려오기도 한다며, 시간은 조절 가능하다며 테두리에 보석을 돌려 붙인 금장 손목시계의 알을 내게로 들어 보였다. 빨간 가죽줄이 그녀의 하얀 손목에 잘 어울렸다. 

  자리를 옮겼다. 근처 해물탕 집이었다. 정혜와 그 친구들과 섞여 자주 들락거렸던 집이었다. 홀 양 옆으로 방들이 있어 구두를 벗고 대청마루처럼 올라가서 앉는 자리를 택했다. 찜과 탕, 그녀는 찜을 선택했다. 아무래도 국물은 그녀의 정장에 불편할 수 있겠다 싶었다. 일단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니까.

  

  "소주?"


  낮에 느꼈던 차가운 맥주에 대한 욕구는 사그라졌는지, 찜을 시키는 순간 주종이 소주로 바뀌고 말았다. 

  

  처음 보는 여자, 괜찮다, 깔끔하고 매너 있고 밝다, 대화가 이어지면서 재미있다, 내가 느끼는 것처럼 그녀도 느끼고 있을까? 여자가 던힐을 하나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짧게 한 모금 빨아들이고, 내게로 담배를 넘겼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담배를 건네받고 그녀가 묻힌 루즈 위로 입술을 감싸며 한 모금 깊이 들이마셨다. 


  "오늘 어때요?"

  "에?"

  "집에 누가 있냐는 말이에요."

  "아, 예..."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무도 없는 집, 빈방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서로의 잔에 소주를 따랐고, 우린 잔을 부딪쳤다. 여자가 곧잘 술을 했다. 


  "이제 이름 불러봐요. 안 그러면 나, 가방 싼다."


  여자가 답배를 꺼낸 백의 뚜껑을 닫고 허리 옆으로 끌어당기고는 일어서는 시늉을 했다. 


  "변양? 미세스 변?"

  "그냥 영주야, 해봐요."


  그렇게 영주는 내게 이름을 불렸다. 


  "이 집 아구가 맛있다고 소문났어, 어서 들어요."


  저녁시간이 되자 손님들이 들어차기 시작했고, 홀을 넘어 좌우의 방들에도 빈틈없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남들 속에서 그래도 우린 즐거웠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웃고 떠들었다. 


  "그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과장한테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나, 일본 3년 살다 왔어요, 그랬거든, 근데 일이 터진 거야, 부서 일어담당이 일어가 짧아.. 하하하, 일어가 짧아... 오덴끼 떼뜨까, 덴노만다이... 일본어 혓바닥이 짧았던 거라고, 그래서 나카무라상이 못 알아먹는 거 있지? 그래서, 야, 그 3년 살다 왔다는 애 데리고 와, 그렇게 된 거 있지? 그래서 내가 일어통역 전담이 됐다니까, 글쎄... 회사도 미쳤지 믿을 게 없어 내 말을 믿어..."

  "그래서 통역은 잘했구?"

  "잘 하긴 개뿔, 그냥 안 들리는 건 주워 넘기고, 이분이 샘플 100개 달라는데요? 다음 달 15일까지 현지에 도착할 수 있냐? 그러는데요? 들리는 것만 말해줬지... 고장이 하는 말이 아주 잘했대! 근데 그 나까무라상이 나한테 뭐랬는 줄 알아? 아놔.. 이거 참 내, 지금도 기억난다... 하하하"


  여자는 연신 손뼉을 쳐대며 입을 막고 기가 넘어갈 듯 웃어 젖혔다. 


  "앞에 뭐라 뭐라 그러더니, 말끝에 이러는 거야, 아나타 니세모노다요네? 보쿠노 이우 코토 와카라나이데쇼? 너 가짜지? 내 말 못 알아먹지?"


 유쾌하고 밝은 여자였다. 옆 자리의 사람들에게 미안했던지 그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낄낄대며 웃겨 죽겠다고 발을 동동 거렸다. 

  

  "아, 나 진짜, 눈물 난다."     


  그녀는 눈가의 눈물을 찍어내는 듯 손가락으로 눈가를 찍어냈다. 그러면서 무릎을 세워 오른쪽 스타킹을 말아 내리더니 종아리를 지나 발목 끝까지 휙 벗어 버리곤 둘둘 말린 살색 스타킹을 건너편의 내게로 휙 던졌다. 어떨결에 공을 받듯 받아 든 나는 얼른 손에 말아 쥐고 테이블 밑으로 내렸다. 


  "오빠 다리 벌려 앉아 봐."


  시키는 대로 테이블 아래로 두 다리를 길게 죽 뻗었다. 그 순간 놀랍게도 가랑이 사이로 그녀의 두 발이 보였다. 하나는 스타킹을 신은 발이고, 하나는 맨발이었다."


  "오빤 어떤 발 좋아해? 맨살? 스타킹?" 


  아주 많이, 도발적인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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