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가 상대의 목소리만을 듣고 다시 전화한다는 말을 던지고, 횡급히 폴더를 닫고 핸드폰을 손아귀에 꼭 쥐었을 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철호 역시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고, 차는 회전하며 반대편도로로 넘어와 있었다.
둘은 아무말도 할 수없었다. 정혜는 정혜대로, 철호는 철호대로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는지도 몰랐고, 감정을 억누르는 ㅅ람과 들키지 않으려는 사람의 신경전이 머릿속으로 펼쳐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긴장감이 흘렀다.
"얼마나 됐니?"
"......"
정혜는 부정과 긍정 둘 사이에 있었다. 부정 쪽은 사실확인과 감정싸움의 지옥으로 변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의 떳떳함을 지금 이순간 거짓의 뻔뻔함으로 위장해야 한다. 한순간에 벌어진 틈은 메울 수없는 신뢰의 간극이 되어 버린 듯했다. 그건 불가능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동시에 긍정을 하면 모든 것이 단순명료해지고 간단하게 정리된다. 지리하고 멀고 험한 싸움으로 감정을 앓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겁이 났다. 부정한 짓을 한 자신이 만천하에 부끄러운 존재로 낙인 찍히는 것 같았다.
철호 역시 겁이 나긴 마찬가지였다. 아내의 부정을 확인하는 순간을 자신의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또한 속으로만 추측하고 예단했던 지난 날의 순간들이 이제 모두 사실이 되어 눈앞에 환히 드러난 시원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납득이 안되는 일과 수긍이 안가는 일들이 몇가지 숙제로 남아 있었다. 이제부터 아내를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아내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철호는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눈 앞의 현실, 엎어진 물을 쳐다본 자로 이 엎어진 물을 어찌해야할지 어떤 방법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목이 타고, 손끝이 떨려올 뿐이었다.
"결혼할 상대는 아냐."
그 사이 차는 내려줘야할 장소에 도착했고, 철호가 차를 세우자 정차된 차 앞으로 하얀색 벤이 한대 달려와 섰다. 창문 밖으로 스쳐 지나간 차안에서 아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철호는 그게 상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기와 정혜, 그리고 정호는 같은 대학을 나왔지만 서로 다른 과를 졸업한 선후배 사이로 한 때 사회과학 스터드를 했었다. 철호는 이런 상황이 싫었다. 정혜와 갈라진 틈을 상기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저녁에 보자."
정혜가 차에서 내려 상기의 차쪽으로 걸어갔다. 조수석에 탄 정혜가 상기를 쳐다봤고, 상기는 정혜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철호는 차를 빼서 상기의 차를 앞질러 도로로 운전해 나갔다.
"형이야?"
"가만히 있어."
정혜는 철호이 차가 스쳐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상기의 손을 잡았다.
"왜? 무슨 일 있어? 늦게 왔다고 철호형이 뭐라 했어?"
"아냐, 좀 얹잖은 일이 있었어."
"뭐? 말한다던 거 말했어?"
"아냐, 아직."
정혜는 일이 점점 꼬여간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다.
"나, 오늘 시간이 많이 없을 거 같아."
"왜, 철호형이 일찍 들어오래?"
"정리해야 할 것이 있을 거 같아."
"그럼 한국 들어오는 거야?"
"그건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거 같아, 일이 좀 꼬였어."
"음, 난 언제까지 기다려?"
"조금만 더 참자."
상기는 악셀을 밟아 자신이 왔던 고속도로를 향해 다시 운전해 나갔다.
"나 오늘 멀리는 안될 거 같다고 했잖아."
"북한강 쪽으로 바람 좀 쐬려 했는데? 오늘 같이 평일이면 한시간에 갈 거리야."
"왕복 잡으면 두시간이야."
"방잡고 좀 쉬어도, 5시면 충분히 돌아 올 수 있는 거리거든요?"
"이사람 오늘 서너시면 끝나는 일정이야."
"그럼 한 시간 정도 기다리라 그러면 안 되나? 철호형 인내심 많잖아."
정혜는 착잡했다. 왜 하필 이런 순간에 자신이 두 남자에게 다 노출되었는지 난감했다. 사실, 상기는 정혜가 철호를 사귀기 전에 알았던 사이였다. 스터디 모임을 하기 전 동아리 연인관계였던 둘은 철호가 나타나면서 관계가 깨졌다. 정혜가 철호의 아이를 가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상기가 정리되었고, 정혜는 철호와 결혼하면서 인천으로 살림이 난 것이었다. 집들이를 비롯해서 상기가 몇번 정혜의 살림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상기가 정혜를 잊지 못하고 있었음을 둘은 확인했다. 그럴 때마다 정혜는 단호했다. 한없이 상기를 받아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둘 사이가, 다시 깊어 진 것은 정혜가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간 일이 있은 이후였다. 한국에서 사라진 정혜를 상기 입장에서는 오히려 잘됐다고 반색을 할 만큼 호재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제 보고 싶으면 자주는 될 수 없지만, 언제든 비행기만 타면 된다는, 철호에 대한 눈치 없이 정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더 적극적으로 하게 된 것이었다.
문자를 주고 받고, 메시지 어플을 통해 주고 받는 문자들은 서로의 거리를 없애주었다.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는 서로 반비례했다. 물리적 거리로 인한 안타까움은 둘을 마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인 것처럼 생활하게 했고, 그렇게 가까워진 심리적 거리는 상기가 비행기를 타고 엘에이 공항에 나타나면서 물리적 거리까지 밀착시켰다. 출장간 남편이 집으로 돌아온 것같은 반갑고 정겨운 느낌이었다. 원래부터 그렇게 살고 있었던 사람들 같았다.
상기가 시내에 달 방을 하나 잡았고, 아이들을 학교에 태워주고 돌아오는 길에 정혜가 상기의 달방으로 달려갔고, 아이들 학교가 끝날 때쯤 다시 아이들을 픽업하러 나가는 생활이었다. 정혜는 신혼이 다시 돌아온 것만 같았다. 그렇게 둘 사이에 놓인 거리는 둘을 더 애틋하게 만들었고, 3년전 한국에 왔을 때도, 그리고 지금 다시 한국에 있을 때도 상기의 집에 둘이 종일 함께 붙어 있을 수 있었던 사정이 만들어 졌던 것이다.
상기의 밴이 톨게이트를 향해 오르막 길을 오를 때, 정혜는 암 레스트에 올려진 상기의 손을 꼭 잡았다. 정혜는 상기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상기의 손바닥 더 안쪽으로 깊이 정혜의 손가락 끝이 파고 들어 상기의 손바닥이 그녀의 손끝에 닿도록 더 꽉 끌어 잡았다. 정혜의 마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