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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Oct 07. 2024

헤게모니, 데자뷔

  꼭, 10년전의 일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난 듯하다. 그때도 역시 같은 일이, 발화자와 수신자만 서로 바뀌었을 뿐, 똑 같은 일이었다. 내가 정혜에게 원했던 것, 그건 단지 조정이었고 화해였다. 그 어디에도 폭압적 행태는 없었다. 그렇지만 한가지 남자로서의 포용을 가장한 헤게모니 장악이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너그럽게 보이지만 사실은 계산이 적용된, 그러나 나는 그것을 계산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직면한 현실은 내게 너무도 큰 분노와 배신감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분노와 배신감이라는 감정 안쪽에는 형체도 없이 숨어 있던 놈이 하나 있었다. 이해와 용서라는 가면을 쓴 생존이라는 놈이었다.

  이것도 일종의 생존 게임이라고 본다면, 내 생존법은 상생을 위한 유지보수인 셈이었다. 유지보수의 방식은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충격을 준 한 개의 사건을 계기로 나 자신을 돌아보고,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돌아보면서 정혜와의 관계도 개선될 여지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잠시 흔들렸던 평화를 되찾고, 결국 아무도 죽이지 않았고, 죽은 자도 없이 모두가 다시 생존하는 것이다.  


  "그럼, 우리 모텔 가자."


  그녀와 함께 방학을 보낸 그 시절, 그녀는 나에게로 퇴근했고, 작은 방 침대에 함께 누웠고, 저녁 때가 되면 거실로 나와함께 라면을 끓여 먹었고 다시 소파에 누웠다가, 거실 바닥을 뒹굴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에어콘을 틀어놓고 블라인드를 친 베란다 타일 위에 의자를 하나씩 놓고 서로의 몸을 쳐다보며 담배를 피우며 함께 웃었다.

  어쩌다 그녀로부터 연락이 없는 날은 내가 그녀의 회사 앞에서 기다렸고, 그녀는 베시시 웃으며 몸을 옆으로 비틀며 내게로 다가왔다. 물이 들어오면 길이 막힌다는 서해안의 작은 섬으로 들어가 자고 오기도 했고, 고속도로를 타고 외곽으로 빠져 경기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음식을 먹으러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아내가 돌아왔고, 나도 개학해서 학교에 다시 나가게 되면서, 그녀가 나를 찾는 횟수도 뜸해졌다. 어쩌다 내가 시간이 나서 그녀의 회사 앞에 차를 대고 있으면, 나를 발견한 그녀가 전처럼 베시시 허리를 꼬며 종종걸음으로 내게로 달려 왔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날 저녁, 시내에서 술을 마시고,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그날은 하루 종일 그녀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괴롭고 힘들었다. 그런 마음으로 정혜의 얼굴을 쳐다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보다 더 나를 괴롭힌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짓, 해서는 안되는 짓을 하면서도 끌려들어가는 힘을 정혜라고 어찌 할 수 없었다는 점과 나 역시 그 힘에 이끌려 그녀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던 내 마음이었다. 너무도 그녀가 보고 싶었고, 전화를 건 나에게 그녀는 두말 없이 오라고 했다. 칠흑같은 밤이었다.


  "어서 와."


  현실의 고통과 괴로움, 죄의식조차도 그녀를 멀리하진 못했다. 그녀를 소홀히 하는 일은, 또 하나 내가 용서하고 싶지 않은 일이 되어 버린 듯했다.  어느 것 하나는 지켜야했다. 그리고 나는 아내, 정혜를 선택했다.

  새벽에 눈을 떴을 때, 그녀가 내 옆에 누워 있었다. 나는 기척없이 일어나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개어져 있는 옷을 하나씩 입었다. 그녀가 눈을 비비며 같이 일어났다.


  "왜? 가려고?"


  나는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 말 하지마, 늦었어 마저 자고 가."      


  현관 문을 반쯤 열고 내다보고 있는 그녀를 뒤로 하고 차로 내려온 나는 시계를 봤다. 새벽 5시, 좀 있으면 해가 뜰 것 같았다. 망설였다. 집으로 들어갈 지, 연구실로 바로 올라갈지, 연구실로 가서 좀 쉬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했고, 그길로 서울로 차를 몰았다.

  그날 저녁부터 정혜는 집요하게 물었다. 어디에 있었는지, 누구와 있었는지, 해명과 변명을 일관되게 했지만 정혜는 풀리지 않은 의문처럼 마음 한구석에 이 일을 저장해 놓은 듯했다.


  "정규선배한테 내가 전화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정혜가 정말로 정규선배한테 전화를 했을 수도 있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날 정말로 정규선배가 낀 술자리가 있었으니까, 정혜가 전화를 해도 내 출석은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의 시간이었다. 12시 넘어서 사라진 내 행방에 대해서는 나와 그녀만이 증명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정혜가 모르는 사람이고, 그녀가 내 행방을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를 통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이었다. 거짓말을 못하기 때문에, 다만 숨겨야 할 사실을, 말하지 않을 뿐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진실과 사실만을 말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란 사실을, 나는 나 자신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이런 일이 생기고, 또 그런 부자연스러운 일이 앞으로 더 자주 발생할 처지에 놓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불안감이 밀려왔다. 떳떳하지 못한 것, 누군가 지켜보는 것을 몰래 하고 있다는 비도덕감을 안겨 주는 일이라 하더라도, 후한이 없고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해도 되는 여건이 조성된다면 인간은 언제든 그걸 하게 된다는 걸 알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일단 그 물에 들어왔다면, 한껏 흑탕물을 뒤집어 써야한다는 것도 알았다. 나쁜 짓을 할 수있는 기회는 좀처럼 다시 없을 것이었고, 그것은 묘하게도 은밀하고 통쾌한 쾌감을 맛보게 해 줄테니까.

  내가 아내가 있는 것 처럼, 그녀 또한 남편이 있었다. 남편의 직업 특성한 나가서 밤을 새는 일이 많았고, 일이 생겨 야간에 자신의 차안에서 밤을 샌다는 남편은 오전에는 집에 들어와 밥을 챙겨먹고, 오후에 출근을 해서 일을 보는, 다소 특이한 일을 한다고 했다. 그녀도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겪는  배우자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형사야? 잠복근무를 당신 집앞에서 하면 우린 어떡해?"


  그녀는 웃었고,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 장담을 했다.


 "그런 직종 아니니까, 걱정마."


 서로의 배우자가 있으면서 다른 상대를 만나 몸을 섞는다는 것에 떳떳하지 못한 불안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극장에서 어두웠던 주변이 서서히 밝아지면서 천천히 전체가 시야에 들어오는 것처럼, 하나씩 현실을 인지하게 된 것 같았다. 그녀가 내게 다가왔던 것은, 남편에게 문제가 있었고, 남편을 대체할 다른 남자가 필요했기 떄문이었다. 그녀의 필요에 내가 걸려든 것이라고 말한다면 분별력없는 무책임한 말이라고 지탄받을 일이었고, 나 역시 무언가에 끌렸다고 할 수 있다. 그건 매우 인간사회의 원초적 금기에 대한 것이었고, 인간이라는 집단이 선을 그어놓고 넘어가면 안된다고 금지시켜놓은 경계너머 저쪽 세계에 관한 것이었다.

  양극을 놓고 둘 중 하나만을 골라야하는, 애초부터 불합리성을 내포한 사회였다. 우리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희생을 감수해야한다는 전체주의적 발상에 지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 그건 내게 폭력과도 같은 조건이었다.

  어쨌든, 불안은 어쩔 수 없었다. 안전한 생존을 바라는 생물의 근본적인 불안감은 초원시대의 인간에게서부터 내재된 학습결과인 줄도 몰랐다. 지난 수만년간 유전자를 통해 내려온 걸 겨우 한 세대에 지나지 않은 내가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힘에 부치는 행동을 하고 만 것이었다.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였다. 공원 주차장에서 불안을 숨기고, 그녀에게 헤어지자고 말한 것은 나로서는 커다란 결심이었다. 유지보수가 가능했으니까. 그때 주저하고 망설이는 눈빛으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럼, 우리 모텔가자."    


  뜻밖이었다. 그녀가 내게 원한 것은 그게 다였다. 나를 향해 마지막으로 선택한 그녀의 말은 겨우 모텔이라는 단어였다. 나에게 겨우에 해당하는 말이 그녀에겐 큰 소원이었던 셈이었다. 모텔이라는 말 속에는 어떤 인간적인 교감도 없었고, 끈적이는 액체와 따뜻한 체온, 펄떡거리는 생명의 고동소리만으로 들끓었다.

  어쩌면 그녀가 옳았는지도 몰랐다. 서로의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은, 서로가 살아남기 위해 딱 거기까지만 교감할 수있다는 것을 말하는지도 몰랐다. 어리석게도 나는 거리의 여자에게 사랑을 구하는 우를 범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아니 더 확실하게, 내가 그녀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사랑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혜에게 호텔에 가자고 한 일과, 그녀가 내게 모텔에 가자고 한 일은, 그래서 묘하게 겹쳤다. 정혜는 지금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내 말을 거부할 이유나, 권리가 그녀에겐 이미 없었다. 내가 그녀를 완전히 장악했던 것이다. 헤게모니, 둘 사이에 놓였던 그것을, 이제 완전히 내가 가져온 거였다.

  그녀도 나에게서, 내가 정혜에게 했던 것처럼, 나를 장악했다는 성취감을 느꼈을까? 호텔이나 모텔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여러가지 변수가 작용했겠지만, 이 짧은 순간, 미소와 함께 베베 꼬던 허리로 나를 향해 달려오던 그녀가 내게 가졌을 그 감정에 대해 논리적 가역 없이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그녀와 나의 생존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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