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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Oct 06. 2024

서로가 하지 못하는 말 3

  정혜가 인천 집의 문을 열고 들어온 시간은 오후 네시 반이었다. 상기가 아침에 정혜를 태웠던, 그 장소에 다시 내려줬을 때, 굳이 정혜는 걸어서 가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생각거리가 많아 보였던 정혜였다. 한강변을 타고 드라이브 갔던 일은 잘 선택한 일이었지만, 강변의 모텔에 차를 세웠을 때 정혜는 속병이 난 사람처럼 찡그린 얼굴이 되어 그늘진 눈빛으로 말했다.


   "나, 그럴 기분이 진짜 아냐. 오해 하진 말고."

   "괜찮아? 아파?"


  고갤ㄹ 가로젖는 정혜의 손을 잡은 상기가 모텔을 벗어나, 아래로 난 길을 따라 강변으로 내려갔다. 도로 갓길에 주차를 하고 둘이서 강변을 걸었다.


  "너, 나랑 결혼하고 싶니?"

  "우린 결혼이 종말이 될 거야."

  "무슨 뜻이야?"

  "결혼하고 싶어서 내가 누나 만나러 미국까지 간 거 같아?"

  "그런 거 아니었어?"

  

  상기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도 하나 줘"

  

   수술방을 나온 이후 담배를 끊었던 정혜였다.


  "누나가 결혼하고 나한테 그랬잖아?"

  "뭐라고..."

  "너 안 잊을게, 그때 누나 눈빛을 누난 모를 거야."

  "내가?"

  "신부대기실에서, 내 손을 잡고 누나가 말했잖아."


  정혜는 기억했다. 이제 상기를 다시 보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고, 자연스럽게 그와 헤어질 시점이 지금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우린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은..."

  "알아, 작별의 말이었다는 거."


  상기의 입에서 훅 뱉어내는 담배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담배 연기는 둘이 서 있는 강의 수심을 향해 날아갔다. 정혜 역시 담배를 길게 빨아 연기를 뱉어 냈다. 둘은 나란히 담배를 손가락에 끼고 강 건너 숲 쪽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그때부터 난 시작이었어."

  "뭐가?"

  "내 마음이 움직였어..."

  "......"

  "놀라운 일이었어, 누나가 날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 내 속에선 그동안 몰랐던 이상한 감정이 솟는거야."

  "그래서 울었구나. 사람들 다 보는데서... 바보같이."


  한 사람의 사랑이 끝났고, 한 사람의 사랑은 시작되었다고 했다. 둘은 그러한 상황에 서로 먼 강 건너 숲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은?"

  "참 이상해."

  "누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 거 같아."

  " 내 마음이 어떤데?"

  "이제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 같아."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어딨어? 나이가 몇 갠데, 이제 그 딴 걸 하니?"

  "우린 둘 다 바보야. 누나 몰랐어?"


   정혜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참, 오랜만이다, 담배. 답답했던 게 좀 풀리는 거 같아."

  "몸에 나쁜 건, 중독돼"

  "그럼, 넌 내 몸에 나쁜 거였네?"


  정혜가 웃었다. 둘은 깔깔 대며 서로의 옆구리를 찔렀다.

  실제로 정혜의 삶에서 상기가 정리된 것은 결혼 후부터였다. 집들이다 뭐다 해서 선후배들이 모여 몇 번 인천 집으로 놀러 왔을 때를 제외하고 정혜는 상기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엘에이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던 것이다. 거의 15년 만이었다. 그렇게 둘은 늦게 터지는 불발탄처럼 터졌다. 예고 없이 큰 충격으로 서로에게 자신을 거리낌 없이 던졌다. 완전한 조건이 조성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둘은 그렇게 지난 세월을 정리했다. 둘이 함께한 세 시간은 그래서인지 더 이상 들뜨지 않았고, 조용하고 차분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쓸쓸함이 묻어나기도 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철호형이랑 잘 해결해. 아까 아침에 철호형 표정 안 좋게 뵈더라."


  상기가 떠나는 차 꽁무니를 바라보면서 정혜는 갈피를 잡을 수없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자신이 나서서 정리할 수 없는 정황이었다. 지금 와서 모르쇠로 발뺌할 수 없는 성질의 일도 아니었다. 분명 물은 엎질러졌고, 상대가 어떤 주사위를 던질지 바닥의 숫자를 보아야 한다. 분명 자신에게 결정권은 없었다. 하자는 대로, 이끄는 대로 자신은 휘둘려야 할 때인 것 같았다.


  "집에서 할 얘긴 아닌 것 같다. 집 앞에 테스라고 호프집이 있어, 그리로 와, 10분 후에 도착할 거야."


  정혜는 가방에서 긴치마를 꺼내 입고 길을 나섰다. 이 동네를 떠난 지 7년째였다. 동네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겠고, 마트나 주변 가게들에 아는 알굴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혜는 지나치는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지 않는 성격이었다. 오가며 인사는 하지만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아서 모르면 모르는 사람일 것이고, 아는 체하면 또 아는 사람이 되는 그런 관계를 유지했다.  

  철호가 앉은 앞자리에 가서 정혜는 앉았다. 호프집은 이제 막 문을 열었는지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주인 여자가 선풍기를 틀고 에어컨을 켜주었다. 500 두 잔과 마른안주를 시킨 철호가 안주머니를 뒤적거려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정혜 앞으로 내밀었다.

  거기에는 정혜에 대한 어떤 원망의 말도 없었다. 전화기 너머의 상대가 누구였건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고 7년간 남자 없이 타지에서 홀로 아이들을 키우느라 고생하면서 그런 여자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해, 남자와 몸을 섞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는 너그러움 등이 담긴 편지였다.

  그리고 한편으론 지난 7년간 철호의 고통이 담긴 내용도 함께 들어 있었다. 주변의 시건,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친구들, 처음과는 다르게 홀로 생활하게 된 자신을 피하는 학교의 동료들, 그리고 무엇보다 갈 곳이 없는 외로움은 술로 달래며 쓰러져 자는 일이 다반사였던 지난 7년의 생활이 들어 있었다. 그래도 넌, 아이들과 함께 있었지 않느냐는 말에 정혜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철호는 거침없이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고, 정혜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원망과 비난을 뒤로하고 철호는 정혜를 감쌌다. 남자인 나보다 여자인 네가 더 고생이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타지에서 말도 통하지 않았을 널 생각하면,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생각도 든다, 넌 큰일을 해 냈다는 등등의 말들을 격해지는 감정을 누르며 하나씩 준비한 원고를 읽듯 했다.

  철호의 결론은 살면서 그런 일 한 번쯤 없겠냐, 하는 일종의 위로였다. 그 위로는 자신을 위한 것인지 정혜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것이었다. 위로를 가장한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었지만, 연구실 노트북 앞에서 손가락을 떨며 썼던 심정이었다. 철호는 겉잡을 수없는 감정을 다스리며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둘 사이에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 언성이 높아져 감정을 주체할 수없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 장담하지 못할 일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집은 안 된다, 장소는 밖이다. 환경 조건 자체가 감정을 폭발시킬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누군가의 시선이 필요했다. 사람은 적고, 가급적 주인이 혼자 있는 가게를 찾아 들어갔다. 정혜를 감싸주고 나면, 어떤 문제가 남는지 그 건 알 수 없다. 일단 그렇게 봉합하는 것이 우리 모두를 위해 안전하다. 우리 관계를 유지하는 것, 이 것이 최선이다.   

  철호는 여기까지 생각한 후 말보다는 글이 감정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고, 그걸 프린트해서 몇번을 읽고 고치고, 또 읽고 고쳤다. 


  "역 앞에 봐뒀던 데가 있어. 거기로 가자."


  철호가 말한 거기는, 전철을 타고 서울로 출퇴근 할 때 집으로 걸어 올라오는 중간에 늘 지나쳐 왔던 팰리스호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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