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사탕 Oct 08. 2024

수치와 자존의 두 얼굴

  남편의 손을 잡고 들어온 곳은 전철역 건너편에 있는 5층짜리 작은 호텔이었다. 남편은 프런트의 안내 여직원과 가볍게 농담을 하며 키를 받았다. 나는 최대한 미소 지으려 했고, 남편의 옆에 서 있을 때나, 그의 뒤를 따라 복도 안쪽으로 들어갈 때나,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으면서도 줄곧 하나의 생각에 멈춰 있었다.


   '그는 왜 이런 데를 오자고 했을까, 들어가서 뭘 하려는 걸까...'


  제일 크고 좋은 방을 달라고 하는 남편의 말에 루프탑도 괜찮겠냐는 여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키를 받아 돌아선 남편이었다.


 "여길 지나다니면서, 늘 들었던 생각이야. 꼭 한 번은 들어와 보고 싶었단 말이야."


  그러면서, 자기는 누구랑 이런 델 들어올 수 없어서 이런 공간이 너무 궁금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한 순간 나는 이런 델 드나든 여자가 되어 버렸고, 내가 한 경험을 자기도 이런 식으로라도 해보고 싶다는 뜻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뭘 얻겠다는 것인지, 그래서 뭘 더 알고 싶은 것인지 그 속마음을 알 수 없었다. 이런 델 데리고 들어와서 해코지를 할 그런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남편의 인격을 믿고 살았다.  


  "당신 돌아가고 몇 번 같이 잤을 뿐이야. 당신 있을 땐 그런 관계가 아니었어"


  남편에게 한 내 말은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것도 눈물을 흘리면서 한 거짓말이었다. 불과 6개월 전, 1월에 미국집을 방문한 남편은 집에 혼자 머물면서 계속 나를 주시했다. 어디도 데려가지 않고 내가 일부러 남편을 유폐시키다시피 했으니까, 아마도 남편은 종일 혼자서 집에서 심심했을 것이다. 그것도 한 달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국에서 방에 갇혀 지냈던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는 4시까지 남편이 집에서 하는 일이라곤 책을 읽거나, 주문형 비디오 서비스를 통해 영화를 보거나 하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아파트 전체 출입문에 비번이 걸려 있어서 마음대로 밖에도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내게 비번을 물어볼 수도 있었겠지만, 남편은 기거하는 내내 물어보지 않았다.

  내가 평소처럼 퇴근해서 그의 집으로 운전해서 가면 4시가 조금 넘는 시간이었다. 어떤 때는 내가, 어떤 때는 그가, 집에서 기다렸고 우린 그렇게 만났다. 나보다 세 살 어린 남자, 교포 2세였고 이혼남이었다. 그의 구애가 시작된 것은, 그를 통해 RN(registered nursing) 과정을 소개받고 CGFN(예비간호사 시험) 시험을 준비할 수 있게 만들어 주면서부터였다. 그리고 다운타운 한인 병원에서 나의 간호사 경력을 살려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 있게도 해 주었다.

  그는 DC(Doctor of Chiropractic) 닥터였다. 우리로 치면물리치료사 정도였는데, DO(doctor of osteopathy) 닥터가 되어 척추 전문의가 되는 게 그의 최종 목표로 공부 중이라고 했다. 유학정보 에이전시를 통해 들었던 얘기들을 현지에서 실행하기란 정말 맨땅에 머리 받기식에 무작정 상경해서 김서방 찾는 식의 모험이었다. 더구나 난 영어도 많이 부족했다. 오죽하면 의료 용어를 모두 외웠을 지경이었다. 하루에 10개씩 외우고 또 외우면서 100개 200개 이런 식으로 의학용어를 암기해 가면서 교수들의 말을 제일 잘 알아듣는 학생으로 칭찬받으며 학교를 다녔었다.

  나에게 공부과정을 알선했고, 병원을 알아봐 주면서 스스로 살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해 준 사람에게 감사와 고마움으로 보답하는 것은 아무리 그 횟수가 많아도 흠이 되지 않는다고 배웠고, 나는 그에게 그렇게 감사의 표시를 했다. 그와 사적으로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어느덧 그에게 의지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내게, 나흘 일하고 3일쉴 수 있는 한인 타운의 한방병원 일자리를 소개했고, 나는 쉬는 3일간 공부에 전력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모르는 것을 물어보고, 해결되지 않는 생활의 문제를 그가 와서 해결해 주면서 식사 자리가 잦았고, 아이들과 함께 외식을 하며 미국인들만 간다는 고급 레스토랑도 그를 따라 자주 드나들었다.

  그는 식사자리에 늘 꽃을 사들고 왔다.


  "미시즈 박 만나려고, 한 시간 거리를 항상 달려갑니다."


  그가 웃는 입속으로 하얗게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발게 웃었다. 해변에 있는 꽃시장까지 왕복 1시간 거리라는 뜻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나를 만나러 오는 길에 나에게 줄 꽃을 사러 꽃시장엘 들렀다 오는 남자였다. 그가 내게 쏟은 열정만큼 내가 그에게 표시한 감사의 기간이 3개월이 넘어가는 때였다. 나는 은근히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은혜의 감정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상기가 엘에이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에게 상기를 소개했고, 그렇게 셋이 바닷가를 드라이브하며 경치를 구경하면서 좋은 음식도 먹으러 다녔다. 상기 해변 몰로 커피를 뽑으러 간 사이, 래돈도 비치 항구의 선착장 끝에서 그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 정혜 씨 남자군요. 먼 거리만큼이나 사랑은 가까워지지 않아요. 눈에서 멀어지면 다 사라지겠죠.“


   한가롭게 갈매기가 몇 마리 상공을 선회했고, 선착장의 말뚝 위에 앉아 우두커니 먼바다를 바라보는 갈매기들이 한가로웠다.


  "우리 이렇게 하기로 하죠. 저 사람이 돌아가면 제가 그 자리에 들어가는 걸로... 더블데이트는 저도 싫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는 나타나지 않았고, 상기는 첫 해에는 분기별로 와서 15일 정도 머무르다 돌아갔다. 꽤 정기적으로 들어왔다 돌아갔으므로 모르는 사람들은 상기를 남편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꽤 있었다. 그러다가 상기의 방문이 6개월에 한 번, 나중엔 1년에 한 번으로 줄어들자, 나는 상기를 기다리는 걸 포기해야 할 때가 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모든 게 부질없는 짓이었다. 내 남자도 아닌 남자를 내가 그렇게 기다릴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혹시 상기가 한국에서 결혼이라도 했다면 더 큰일 날 일이었고, 나로선 정말 염치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미국생활도 어느정도 익숙해졌을 무렵,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무슨 낯으로 그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부끄러웠고,  그 앞에 다시 나타날 그럴 용기도 내겐 없었다.


  "다 알아요, 오늘부터 데이오프인 거... 거기 그대로 있어요."


   벨이 울렸고 문 앞에 선 그가 꽃다발을 안겼다. 파란 대롱 같은 줄기 끝에 연노랑의 잎이 종이를 말아놓은 것 같은 꽃대가 핑크 코르사주에 싸여있었다.


  "이건 카라꽃이예요. 카드를 끼워 넣었는데 읽어보시고, 맘이 움직였다면 다시 문을 열어주세요, 5분만 딱 기다렸다 갈거에요."


  그리고 그가 밖에서 문을 닫았다. 나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그가 시키는 대로 꽃대 사이에 꽂혀있는 카드를 꺼내 읽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카라꽃은 내 마음 같아요.

   이 꽃은 숨김없는 마음, 천년의 사랑이란 뜻을 가졌대요.

   대만 사람들은 이 꽃을 결혼식에도 쓰고, 장례식에서도 쓴. 다고 해요.

   그래서, 이 꽃의 꽃말에는 시간이란 뜻도 있어요.

    혼자 살아가는 시간을 끝내고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이 하나의 마음으로 당신과 장례식장까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으로

    카라꽃을 당신께 드립니다.

   ps.대만에 같이 가요. 당신에게 카라꽃이 지천으로 깔린 내 마음 전부를 보여주고 싶어요.‘


  나는 순간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목이 잠겼다. 내가 뭐라고, 내게 이런 순정을 다 쏟는 남자가 있다니..., 너무 감사하고 고마워서 참았던 눈물이 나도 모르게 주르륵 흘렀다.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쳐내며 현관문을 잡아 당겼다. 그가 무릎 꿇은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긴장한 눈빛으로 주머니에서 반지케이스를 꺼내 뚜껑을 열어 내가 볼 수 있도록 앞으로 내밀었다.   

  그가 팔을 뻗어 꽃다발을 잡고 있는 내 손을 찾았다. 나는 약지의 결혼반지를 빼서 오른손에 넘겨주고, 아무것도 없는 빈 손가락을 그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그렇게 그가 내 집에 들어온 날부터 3일 동안 그는 내 집에서 먹고 잤다. 그는 내게 허니문이라고 속삭였고, 나는 내내 그의 옆에서 고마워서 슬펐다. 그렇게 3년을 그와 함께 지냈고, 남편은 이듬해 무슨 일 때문인지 미국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들도 그가집에 있는 걸 당연히 받아들였고, 그와 함께 식사하고 게임하고 장난치는 걸 즐거워했다.


  "아저씨 자고 가, 응? 집에 가도 아무도 없잖아?"


  이렇게 아이들이 먼저 내 침대 옆에 그의 잠자리를 봐 놓고 안방 문의 자물쇠를 밖에서 잠가버렸고, 몇 번 문을 두드리던 그도 못 이기는 척하며 내 옆에 와서 누웠다. 아이들에게 그는 좋은 아빠였고 신뢰할 수 있는 좋은 교사였다. 그렇게 한집에서 산지 2년이 지났고, 그러는 사이 집에 여기저기 놓여 있었던 가족사진이 치워졌고, 집안에 흩어져 있던 남편의 흔적은 하나씩 지워져 나갔다.

 그리고 남편이 올 1월에 미국에 들어온 날부터 돌아가기까지 한 달간, 나는 마치 낯선 남자가 내 옆에서 코를 골고 있는 것 같은 이질감에 혼란스러워 했다. 먼 데서 온 사람, 사랑은 거리에 반비례한다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아, 이제 이 사람이 남이 되었구나, 하는 걸 느낀 한 달이었다. 더욱 그와 살을맞대는 건 외간남자와 살이 닿은 것 같은 이물감과 함께 몸이 떨릴 정도의 감정 변화가 왔다. 남편도 내게 가까이 오지 않았으니 우린 그저 같은 침대에서 잠만 자는 무늬만 부부인 그런 커플이 되어버렸다.

  어느 일요일이었다. 발코니로 따사로운 햇살이 들어와 거실이 환해지면서  바닥의 러그 바닥에서 천천히 햇살에 반사되는 먼지알갱이가 공중부양한 상태로 시간이 멈추어 선 것 같은 그런 날이었다. 나는 갑자기 궁금했다.


  "당신 그때, 진짜 어디서 누구랑 있었어?"


  남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그러는 넌, 그날 새벽에 어디서 누구랑 있었는데?"


  조용하고 차분한 남편의 말이 일요일 아침, 아이보리색 올이 굵은 러그를 깔고 앉아 양말을 개고 있는 나에게 날아와 꽂혔다. 당일로 갔다 온다던 춘천 세미나, 이승호와 정말로 춘천에 가서 자고 온 그날의 일들이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돌아갈 시간을 연장, 연장한 끝에 고속도로를 총알이 되어 뚫고 돌아온 그날 새벽이었다, 불 꺼진 안방 침대에 누운 나를 남편이 한참을 내려다봤던 그 아찔한 순간이 지금도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나는 세탁물 통을 들고일어나 발코니로 나갔다. 남편의 되물음을 피하는 길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확신했다, 내가 그런 것처럼, 남편 역시 온전치 않다는 사실을.  

  우린 둘 다 서로에게 거짓말로 일관했다. 그걸로 우린 밝혀지지 않는, 혹은 밝힐 수 없는 진실 앞에 떳떳한 체하며 살 수 있었다. 말할 수 없지만, 서로의 마음속에선 다 알고 있는 사실, 사건의 디테일은 없지만 증폭되는 의심만으로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상력이 현실과 사실을 만들어 냈다.


  남편이 카운터에 전화해서, 소주 두 병, 맥주 한 병을 주문하고 마른안주와 컵라면을 시켰다.


  "먼저 샤워할래?"


  남편이 시키는 대로 먼저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반투명으로 되어 있는 유리박스 안에 들어가 샤워기 물을 틀어놓고 한참을 그 속에 서 있었다. 차갑고 세찬 물줄기가 얼굴을 때리고 거슴위로 내려쳤다.

  종일 습기가 많은 날씨였고, 후덥지근했다. 살짝 뜨거울 정도로 따뜻한 물을 만들어 머리를 적시고 몸을 데웠다. 종일 쌓였던 피로가 몰려오는 듯했다. 상기는 잘 들어갔을까? 미국의 그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낮에 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남편이 당신 목소리를 들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하며 전화에 대고 잠시 울었다. 남편이 당신 존재를 알았으니 내가 한국에 온 목적을 쉽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가 나를 위로 했다. 그래도 겁나고 불안한 건 마찬가지 였다. 옆에 없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이 모든 걸 내가 혼자 감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다시 밀려왔다. 정말 조용히 끝내고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서류는 미국에서 준비하고, 난 한국에 다시 나올 필요는 없다고 했다. 한국의 대행업체가 모든 진행을 도와준다고 했고, 불출석 사유가 해외 체류이니 당연히 법정에 출두할 면책 사유가 된다는 것이고, 서로 얼굴 보지 않아서 불필요한 감정 낭비도 없을 것이고 그간의 정리때문에 마음이 흔들려 인정에 끌려 가슴 아픈 일도 없을 거라고 대행업체 직원이 몇 번이나 나를 안심시켰고 자신의 업무처리 능력에 대한 신뢰를 당부했다. 사모님들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게 자신들의 본업이라고까지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일이 한 순간에 막혀 버린 것이었다. 당황한 것은 미국에 있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한국 가서 서류 정리하고 구두승낙만 받아 놓으면 자동으로 남편과는 남이 되고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일은 서로 얼굴보며 달달하게 진행하면 된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그 계획엔 물론 나도 끼어 있었다.  

  내가 샤워를 마치고, 남편이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간 사이, 벨이 울렸고, 남편은 허리에 수건을 두른 채 현관 쪽으로 뛰어가 검은 봉지를 받아 왔다. 봉지 속에 든 술과 안주를 침대 옆 테이블 위에 펼쳐 놓고, 소주를 따서 종이 컵에 한 가득 따라서 그대로 죽 단 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샤워 부스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남편은 목에 수건만 한장 두르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 요새 안 서더라."


  나도 모르게, '저런' 하며 살짝 혀를 찼다. 나도 모르는 동정의 습관이었다. 최근 들어 잘 안 된다는 말을 하면서, 다시 소주를 따라 마셨다. 그리곤 내게도 맥주를 한잔 따라 주었다. 서로 잔을 부딪치고 차가운 맥주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시원하게 갈증이 해소되는 것 같았다.

  사실 그런 얘길 많이 들었던 터였다. 혼자 사는 남자들이 발기에 문제가 생기거나 조루로 발전해서 아무 쓸모없는 생식기 상태가 되어 버린다는, 그런 우스갯소리가 많았다. 써먹지 않아서 그런지, 너무 많이 써서 그런진 알 수없지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생물학적 증거, 용불용설에 더 많이 기울었다. 그래서 남편의 생활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던 것이다.

  남편은 다시 한 잔을 가득 따라 이번에도 한 번에 죽 들이키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침대 위로 벌렁 자빠지듯 쓰러졌다. 그다음으로 내가 남편 옆에서부터 침대 위로 기어올라 간 것은 순전히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진심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떤 감정도 없이 인터코스로 넘어가면서 중반에 이르렀을 즈음 남편이 뒤로 빠지며 내 몸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돌려봐."


  그렇게 남편은 내 허리를 잡았고, 어깨를 잡고, 머리채를 잡았다.


  "개 같아서 이런 거 싫다고 했지?"


  춘천에서 이승호가 나를 그렇게 다루었다. 그날 이후 난 남편을 거부했고, 그런 말을 남편에게 했던 적이 있었다. 남편은 정말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또 기억하고 있는지 디테일에 강한 사람이었다.


  "니가 날 쳐낼 때는 이유가 있었을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니 몸이 내게 말을 걸었단 말이지. 말보다 더 직설적인 게 이런 거야. 그때부터 넌 누군가의 남자가 된 거야."

  “당신을 깎아 내릴 짓은 하지 않았어!”


  나는 남편의 말에 슬픈 것이 아니었다. 미국에 있는 그를 배신하는 이 기분이 더러웠다. 남편을 거부할 수없는 나약한 나 자신이 비참하고 슬펐다. 그리고 나는 남편으로부터 한 없는 조롱과 멸시를 당해야 했다. 남편이 말하는 것처럼 말보다 더 직설적인 몸으로, 수치를 온몸으로 받아야만 했다. 눈물이 침대 위로 뚝뚝 떨어졌다.


 "왜 할 말이 없니? 왜 무슨 일이 있었다고 내게 말을 못 하는거냐?"

  "그러지마, 제발 나한테 그러지마."


  내 목소리는 기어들어갔고, 남편은 집요하게 아래로 손을 놀렸다. 남편이 나를 파고들수록 입을 앙다물었고 뒤척이는 몸이 흔들릴 때마다 안쪽 입술을 더 세게 깨물었다. 눈물은 말랐고, 더 크게 떠지는 눈꺼풀 속의 눈알은 따갑고 뜨거워졌다. 엎드려 채 뒤로 돌아본 남편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풀려버린 흐린 눈으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당신한테 도장받으러 왔어, 막상 한국 오니까 입이 안 떨어졌어..."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금 나의 상태를 정확히 말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 사람, 그냥 순수한 사람이고 날 많이 걱정해 주는 사람일 뿐이야."  


   남편이 내 몸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남편이 길게 숨을 내뱉으면서 내 위로 쓰러졌다. 술냄새가 남편의 입에서 내 입속으로 넘어왔다. 구역이 나는 걸 참았고, 나는 이 모든 것이 더럽고 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명,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전부가 부끄러웠다. 삶이 송두리째 뿌리뽑혀 나간다는 게 이런 종류의 느낌일 거라 생각했다. 참담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고 내 몸은 깊게깊게 침대 속으로 스며들어가듯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지친 심장을 헐떡거리는 한마리 짐승 아래 깔린 채, 나는 그런 기분으로 무너져 내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