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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Oct 04. 2024

서로가 하지 못하는 말 1

 


 후덥지근한 새벽이었다. 열린 베란다 창으로 바람 한점 불어오지 않는 새벽의 어스름이 한방 가득 퍼져 뿌연 안개처럼 흐릿했다.

  철호는, 땀으로 번지르한 정혜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조용히 그녀 옆에 쪼그리고 앉아 질끈 감긴 눈을 보았다. 속눈썹과 눈테두리에 그린 마스카라가 검게 칠해져 있었다. 살만 남은 목줄기 위로 불거져 나온 굵은 핏줄이 검푸른 빛으로 꿈틀대는 것 같았다.

  옆에는 아이들이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하나같이 불쌍한 얼굴들이었다. 잠시 자신도 모르는 덩어리진 감정이 속에서 솟구치는 걸 느꼈지만, 철호는 조용히 일어섰다.

  무작정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세상은 고요했고 어디선가 흐릿한 공기가 퍼져오는 것 같은 이른 새벽이었다.

  철호는 아파트 주차장에 가득 찬 차들 사이를 뚫고 나왔다. 어서 여길 벗어 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후문을 통과했을 때 오른쪽과 왼쪽, 습관적으로 오른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계속 걸었다. 신호를 건넜고, 과거에 기차가 다녔다는 철길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지났다. 다시 오른쪽은 공원, 공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벤치에 앉아,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하늘, 저 하늘 너머엔 깜깜한 어둠만이 있을 것이다.

  철호가 다시 고개를 내리고 공원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멀리서 아침 차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가 사라졌다. 그렇게 차량의 소리가 먼 데서 들렸다가 사라지기를 몇 번 반복하는 사이. 허기진 피로가 몰려왔다. 간밤에 한숨도 못 자고 깨어 있었던 탓일 것이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몽롱한 기운이 몸속에서 일었다. 머릿속이 엉켰고, 손발은 굳어버린 듯했다. 정혜가 전화에 대고 속삭였던 말들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건 연인들끼리의 대화였고, 그 대화는 과거도 미래도 모두 삭제해 버린 지금 현재의 시간만이 존재하는 데서 오는 환희를 주고받는 말들이었다.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눈을 뜬 철호였다. 저쪽이 환하게 빛나는 기쁨의 세계였다면, 이쪽은 어둠 속에 잠긴 비참한 세계였다. 시간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 그저 그 자리에 있거나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 한가운데에서, 사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갑자기 노인들이 공원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두 노인이 철호의 앞으로 지나갔다. 머리가 하얗게 센 두 사람은 노부부였다. 굽은 허리로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의 팔을 부축해서 함께 걷는 할아버지였다. 살집이 있는 할머니를 마른 할아버지가 붙들어 주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평온했고, 잔잔한 미소가 얼굴에 감돌았다. 공원입구로 들어오는 노인들을 향해 할머니가 인사를 했고, 할아버지도 손을 흔들었다. 이른 시간 새벽잠이 없다는 노인들이 띄엄띄엄 벤치에 앉은 것이 보였다.

  철호는 일어나 숲 속으로 들어갔다. 산책로를 벗어나 숲 안쪽 나무와 나무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조금씩 안으로 들어가면서 초록빛의 나무 이파리들의 선명한 색깔이 드러났고, 산자락에 마련된 공원의 모습이 얕은 언덕 아래로 희끄무레하게 내려다 보였다. 낮은 야산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산의 속속까지 들어오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공원에서부터 참았던 그 무엇이 복받쳐 올라왔다. 아니, 한 밤 내, 깜깜했던 방에서부터 참아왔던 그 무엇이었는지도 몰랐다. 철호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몰랐다. 원인은 있는데, 그로 인해 어떤 감정이 촉발되는지, 어떤 것을 끄집어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그만큼 자신이 소화해 낼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들로 뒤섞여 있는 상태였다.

  덜컥 뱃고래에서부터 가슴의 숨이 턱 막힐 만큼의 덩어리가 올라왔다. 그것은 목구멍을 막았고, 이내 코끝을 시리게 했다. 철호는 소나무둥치를 끌어안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그것은 슬픔이었다. 대상이 없는 슬픔이었다. 나의 슬픔이면서, 정혜의 슬픔이기도 했다. 그리고 분노와 배신, 되갚음과 결별의 감정들이 도사리고 앉아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는 듯했다. 누군가 그중 하나를 건드리면 바로 터져 분출될 그런 임박한 감정의 상태였다. 더이상 이성의 힘으로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감정들이었던 것이다.

  소리 없이 울었다. 그리고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둔 채 입을 벌리고 소나무 잔가지가 떨어져 있는 땅을 내려다보았다. 입 밖으로 어떤 소리도 새 나오지 않았다. 눈 앞이 캄캄해져 오는 것 같았지만, 철호는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애들, 아침 첫차로 수원 갔어. 지들끼리 갈 수 있다고 해서..."


  정혜는 아침을 차렸다. 냉장고에 있는 먹을 수 있는 걸 죄다 꺼내 먹을만한 음식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남편에게 최선을 다 하고 싶었다. 그게 자신이 가진 인격으로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그에게 정성을 다 해 주리라, 그런 마음으로 이 집에 들어선 정혜였다.


  "오전에, 상기 알지? 걔 만나기로 했어, 공원 가기 전 다리 앞에 나 세워주면 돼."


 씻고 온 철호는 식탁에 앉으며 그러마고 했고, 별 다른 감정이 일지 않는 자신이 이상할 정도로 차분한 감정을 유지했다. 너무도 평온한 토요일 오전의 식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은 강의가 없는 날이었다. 그런데, 오늘 오후에 학점 미이수자들을 위해 마련한 교양 두 시간 연강이 잡혀 있었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학교에 나와서 시간을 보내는게 그나마 건강을 위하는 선택이었다. 느슨한 하루였다.    

  정혜가 설거지를 하는 사이 철호는 넥타이를 매고 강의에 쓸 참고서적을 몇 가지 가방에 넣었다.

  시계를 보니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철호는 곧장 잠에 떨어졌다. 그러고 몇 시간이 지났을까, 정혜가 자신의 어깨를 흔든다고 느낀 순간 눈을 떴고, 된장찌개 냄새가 났다.


 "여기서 내려줘, 저 신호등 앞에서 만나기로 했어."


  차가 우회전 했을 때, 정혜는 걸어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철호는 자기가 한 바퀴만 돌면 그녀가 약속 장소에 바로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의 편의를 봐주고 싶었다. 따가운 태양의 폭염이 연일 계속되는 날씨였다.     

  차는 도로를 내려가 아래 삼거리에서 유턴을 해서 건너편으로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철호는 내리막길을 달려 삼거리에 차를 대고 유턴 신호를 기다렸다. 그때 정혜의 전화가 울렸다. 폴더폰을 꺼내든 정혜가 덮개를 열자 또렷한 목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졌다.


  "자기야..."


  남자였다. 신호가 바뀌었고, 철호는 차를 돌리기 시작했다. 다시 전화기의 목소리가 밝게 소리치듯 말했다.


 "자기야, 나야!"


  누군가, 두 사람의 감정 스위치를 번걸아가며 조작하는 것 같았고, 이제 아내 쪽의 스위치가 올라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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