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와, 잠재적 조커를 양산하는 시스템에 대항하라
(스포일러가 심하게 드러나는 글입니다. 어린이나 노약자 등 스포일러에 민감하신 분은 영화를 본 후에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정의감에 불타는 교사가 등장하는 영화들이 있다. 67년의 ‘언제나 마음은 태양’(To sir with love)에서는 마크 색커리(시드니 포이티어 분)가, 90년의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는 존 키팅(로빈 윌리엄스 분)이 나왔고, 다시 2023년의 ‘티처스 라운지’에서는 카를라 노박(레오니 베네쉬 분)이 등장한다. 이전의 영화들이 교사를 통해 교육 자체의 각성을 촉구하는 영화였다면, ‘티처스 라운지’는 교사를 통해 시스템을 고발한다. 시스템은 사회적 존재들의 생태가 반영된 구성원들 간의 관련성 체계를 말하는 사회구성체다.
한 세대만큼의 간격을 두면서 등장하는 교사 주인공들을 바라보면, 카를라 노박은 전에 없던 복잡한 연결고리로부터 헤어날 수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대중들이 복잡한 자기기만의 법체계 속에 갇히게 된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팩트도 정의도 더 이상 의미가 없는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학교를 다루는 ‘학교 영화'이면서, 2023년의 시점에서 이 영화의 원산지인 독일뿐 아니라 새로운 ‘진실과 정의’를 한국사회에 요구하는 영화이다.
주인공 노박선생은 14년차로 이 학교에 부임한지 1년된 12살짜리 아이들의 반을 맡고 있는 초등학교 선생이다. 이 학교의 고질적인 문제는 도난 사건이다. 도난은 교실에서도 일어나고, 교무실에서도 일어난다.
교장은 더 이상 이문제를 방치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으로 ‘무관용의 원칙’이라는 교장 교육방침을 들어 어떻게든 범인을 색출해서 사건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그래서 반대표들을 불러 이름을 말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교사가 반 아이들의 명단을 펜으로 지목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반강제적 강요행위임을 담임인 노박은 지적하며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이들편에 서서 말하지만 학교측의 방식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교실에서 소지품검사가 벌어지고, 지갑 속에서 돈이 많이 발견된 아이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부모가 호출된다. 범인으로 지목된 아이는 사회적 약자(아랍계 이민 가정)다. 교장실에 불려온 부모는 지갑에 돈이 많으면 훔친거라고 의심받아야 하느냐고 반발하고 교장은 계속 저황을 반복설명하며 갈등이 고조되자 노박은 재빨리 사과하고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아이를 교실에서 낙인찍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교내 도난 사건은 해결되지 않고 교사들 사이에서도 탐정을 고용하자는 둥 교사들의 교무실 생활은 흉흉하다. 노박은 자신의 노트북을 열어둔 채 상의 안주머니에 지갑을 넣어 놓고 수업에 들어간다. 노트북에 달린 카메라가 범인을 찍어 증거를 잡아 도난 사건을 마무리 짓고 싶었던 것이다.
범인이 카메라에 찍혔다. 촬영된 영상에는 별무늬가 그려진 셔츠가 찍혔을 뿐 얼굴은 없다. 그 셔츠를 입은 사람은 행정실의 쿤실장(학교 행정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으로 영화에서의 번역은 ‘선생님’으로 나오지만 우리 현실로는 ‘행정실장’이다.)이라는 걸 노박은 알고 있다. 쿤에게 달려간 노박은 돈을 돌려주면 모든 걸 덮고 없던 일로 하겠다고 은밀하게 말했지만, 쿤은 불같이 화를 내며 거절한다. 다시 교장실로 간 노박은 영상을 교장에게 보여주게 되고, 쿤으 부른 교장은 사실을 해명하라고 말하지만, 쿤은 증가가 있냐고 대들며 수긍하지 않는다. 쿤은 이 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가버린다. 그 아들은 노박의 반 학생이며 반에서 공부를 가장 잘하는 아이다. 이 아이를 칭찬하기 위해 노박은 큐브를 주며 다 맞추면 돌려달라며 아이의 학습능력을 이런 방식으로 칭찬한 바가 있다.
쿤은 정직당했고, 학교로부터 걸려 오는 전화를 일절 거부한다. 담임 노박과의 통화에서는 불법 촬영과 무고한 자신에 대한 음해에 대한 부분을 사과하라고 요구한다. 학교에서 열린 학부모 회의에서 학부모들의 단톡방에서도 지금까ᆞ지 있었던 학교문제에 대해 담임 노박의 해명을 요구하며 말썽이 벌써 태동하고 있는 분위기다. 이 자리에 나타난 쿤이 교실에서 일어난 도난 사건에 대한 잘못된 범인 지목, 불법적인 소지품 검사, 인권을 무시한 불법촬영 등에 대해 해명하라고 노박을 몰아세운다.
학부모 앞에 선 노박은 피할 곳이 없다. 있는 그대로 해명하고, 특정 문제에 대해서는 공개적인 방식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해명하겠다는 언급을 하고 학부모회는 마무리되지만, 학부모들의 요구는 물러설 줄을 모른다. 우리 아이에게 일어나는 문제에 대하 부모도 당연히 알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노박은 아직 동영상을 공개할 수 없다. 그래서 동영상이 있다 없다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있는 입장이다. 노박의 입장으로서는 이 문제를 덮고 가야 할지 정의와 교육의 차원에서 바로 짚고 넘어가야 할지 고민이 커진다.
늘 그렇듯이 아침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달라졌다. 수업을 거부한다. 쿤의 아들 오스카의 짓이다. 오스카가 헛소문을 퍼트려 담임을 모함한 것이다. 결국 체육시간 중 폭력을 행사한 오스카가 수업 준비실 창문을 깨고 들어가 노박의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달아난다. 가로막는 과정에서 오스카가 노박을 노트북으로 쳐서 노박은 눈에 부상을 입는다. 도망가던 오스카는 다리에서 노트북을 강물 위로 던져버리고 도망쳐 버린다.
노박은 늘 아이들 편이고, 언제가 아이들의 생각과 처지를 가장 먼저 고려하는 선생이다. 오스카의 문제에 대해 학교 징계위가 열려, 오스카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지적하며 정학처분을 내리려고하자, 노박은 그렇게 볼 게 아니라, 오스카는 자기 어머니를 변호하려고 했을 뿌닝라고 말하며 아이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다며 반대한다. 그러나 눈에 난 상천ㄴ 왜 말하지 않는 거냐, 그렇게 학생에게 폭행을 당했으면서도 학생을 감싸주는 당신이 참선생이냐는 등의 비꼼을 받이고 한다. 학생회 신문에 올해 부임한 교사에 대한 취재에 응한 노박은 학생기자들의 질문에 있는 그대로 답변하고, 노코멘트 할 것은 노코멘트로 넘어간다. 주로 도난 사건에 대한 문제들이며 동영상이 있냐 없냐의 문제 등에 관한 부분이다. 그런 부분들이 기사화되어 학생회에서 발행되어 아이들에게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교내 도난 문제에 대해 전교생이 다 알게되고, 동료 교사들에게도 역시 샅샅이 알려지게 된다. 그 동영상을 공개하자, 우리도 거기에 찍힌 거 아니냐, 어떻게 불법적으로 우리를 도촬할 수가 있느냐, 등등의 비난들을 동료들이 뱉어내며 동료 교사들 사이에서도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
오스카에게 열흘 간의 정학이 내려진 학교는 평화를 되찾는다. 그러나 등교하지 말아야 할 정학생 오스카가 교실에 나타났고, 자기 자리에 앉는다. 전체 반 아이들이 다른 교실로 이동하고, 교장과 교사들이 교실에 나타났고 교장은 자발적으로 귀가하지 않으면 경찰들이 너를 쫓아낼 것이라고 법적인 규정을 말한다. 노박은 이들을 모두 나가게하고 교실문을 잠근다. 노박은 오스카의 옆자리에 앉는다. 오스카가 가방에서 큐브를 꺼낸다. 전에 노박이 줬던 그 큐브다. 규브는 모든 면의 색깔이 다 맞아 있다.
오스카는 의자에 앉은 채, 경찰들에 의해 학교 밖으로 들려 나간다. 오스카는 마치 왕과 같은 모습이다.
2023년 7월 서이초등학교 6학년 담임교사가 교재준비실에서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권력형 타살, 신분 과시형 타살, 학부모에 의한 갑질형 타살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수사 결과 이들 학부모에게는 무혐의처분이 내려지고, 전국의 교사들이 다시 분노해 전국 집회로까지 이어지는 사회적 참사가 일어난 사건이다. 교육부에서는 교사들을 달래기 위해 교원평가를 일시적으로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고, 교육부와 우호적 관계를 오랫동안 맺어온 교원단체인 교총과 교육부가 합의했다며 관리자들을 포함하여 교사들의 수당을 올려주었다.
무엇보다 이런 일련의 교육정지의 대파동을 겪으며, 문제 학생을 교실에서 분리할 수 있는 조처가 법적으로 마련되었다는 사실이 하나의 성과로 기록될 수 있겠고, 각 교육청에 전담 기구가 설치되었다는 데 또 하나의 의의가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지켜보며 한국의 정부와 교육당국, 지역 사회는 그동안 아무런 이유와 근거 없이 교사집단을 희생양 삼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길이 없다. 이것은 교육시스템을 미국에서 배워오긴 했지만, 반쪽만 배워온 현상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독일의 교육시스템은 두 가지다. 학부모회(우리로 따지면 학부모 총회라고 불리는 것.)의 형태와, 교직원회(혹은 징계위원회)의 모습이다.
먼저 학부모회에서 부모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데, 학교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출한다는 것이다. 도난 문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범인을 지목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불법적이고 반인권적인 학교의 처사에 대해 담임에게 규탄하는 모습, 교직원회의의 의사결정과정에 학생회 대표 두 명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학생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모습이 그것이다.
학교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의사결정권이 모두 중앙집권적이었다. 권력이 고도로 집중화되어 있는 것이다. 고위공직자들이 꿀을 너무 많이 쳐드셨는지 벙어리로 산다. 이런 사회에서는 말수가 적어야 살아남는다, 그런 침묵을 뚫고 말하는 사람은 미움을 받고 시절로부터 배척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런 와중에 학생들의 자기 의사 결정권의 영역에서 교사와 대립하게 되고, 학부모 또한 학교의 처사를 교사와 동일시하여 학생편에 선 교사가 오히려 매도되는 일이 발생한다.
사건은 이렇다. 교실에서 도난 사건이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범인으로 의심받는 학생의 부모가 학교에 불려와, ‘증거가 있냐? 내 자식이 만약에 그런 일을 했다면 내가 다리를 분질러버릴 것이다!’라며 큰 소리로 당당하게 소리치며 학교와 담임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한다. 교무실에서 발생하는 도난 사건에 대해서 단지 얼굴이 나오지 않은 범행 현장 촬영본을 두고, ‘그게 나라는 증거나 있느냐?’, ‘촬영 그 자체가 불법이다!’, ‘나의 개인 생할이 침해당했다는 데서 큰 굴육감을 느낀다!’ 라는 상대적 대응들이 난무한다.
이건 한국사회와 판박이로 닮아 있다. 범인이 떳떳한 사회, 잘못을 한 자가 큰소리 치는 사회, 당하는 자가 쥐 죽은 듯 조용히 지내야 하는 우리네 현실과 너무도 닮아 있어, 그 슬픔과 좌절에 몸서리치게 만드는 장면들이다.
무죄한 아이들의 편에 선 순박한(혹은 정의롭거나, 절대선에 대한 믿음을 가졌거나 한) 교사를 압박하는 것은, 온통 거짓된 세상이 거칠게 내모는 감정의 불모지에서 느끼는 황폐화된 자신의 모습이다.
서이초등학교의 모든 선생들도 그 자리, 똑같은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노박의 극복 방법은 두 가지다. 그래도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 아이들이 담임에게 반발한 오해를 푼 첫수업에 임하는 교실에서 노박이 벌인 이벤트, 모두 함께 있는 힘껏 고함을 지르는 일이었다. 우리로 치면, 남자들이 군대에서 늘 했던 함성 10초간 발사!에 해당한다. 그리고 도저히 숨쉬어질 것 같지 않은 현실로부터 과호흡을 방지하고 호흡을 고르기 위해 쓰레기통의 비닐봉지를 꺼내 비닐봉지 속의 공기를 흡입하는 행위 등은 노박의 처절한 고통과 견딤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요소요소의 해소가 없었더라면 우린 그 많은 시련과 고통을 어떻게 견뎌 냈을까, 말도 안되는 시스템속에서 허덕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피압박의 트라우마들을 날려 버리는 그녀의 그런 방식. 거기에는 학생들의 스트레스도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시스템은 피해자 가해자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를 피해자로 만드는 악마적 마술을 부린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도 노박이 바른 선생인 이유는 자신 뿐 아니라, 아이들 또한 그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있다는 인식을 동시에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정서의 공감이다. 체육수업을 같이 해주는 보조교사가 있다. 노박은 범인이 입었던 교별무늬 셔츠를 입고 교내에서 이동하는 타인을 보고 뒤쫓는다. 그녀 스스로도 사건이 확산된 이즈음에는 범인이 쿤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옷을 입은 여자를 빠르게 뒤쫒던 노박은 한 순간 멘붕에 빠지고 만다. 복도를 오가는 모든 사람이 별무늬 셔츠를 입고 지나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환상과 같은 이 장면은 노박 스스로 자신에 대한 확신이 무너짐과 동시에, 이를 목격하고 있는 관객에게도 역시 범인의 불확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사회가 노박에게 요구하는 무언의 압박같은 기제로 작용함과 동시에 우리 모두의 무의식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것은 분명 사회적 압박이다. 사회는 학생집단, 교사집단, 학부모집단을 말한다. 자신이 속한 모든 집단들로부터 소외당한 하나의 인격체, 노박이 갈 곳은 없다. 오스카를 징계하고자 하는 학교에 대해 자신이 학교를 떠나겠다며 학생이 학교를 그만 다니게 할 수는 없다는 철저한 학생 중심의 교육관을 가지고 있는 노박 선생이다. 그런 그녀에게 이제 기댈 곳도 하소연할 곳도 없는 상태에 몰려 있는 것이다. 체육수업을 같이 한 보조교사에게 그녀가 던지는 한마디는 이것이다.
“나를 안아줘.”
어려움에 직면한 교사로서 노박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학생들과의 소통이며, 동료들의 사회적 공감이다. 교사가 기댈 곳은 학생과 동료교사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 바탕이 튼튼하다면 교사는 못 할 일이 없다. 둘 중에 하나도 가지지 못한 자의 선택은 무엇인지 한국사회는 답해야 한다.
노박은 아이들에게 무한소수 0.9와 1이 같다는 것을 증명해보라고 한다. 아이들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도식에 의해 증명한다. 이로써 증명 가능한 것만이 법칙이며 사실로 인정할 수 있는 수학의 세계가 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것을 아이들은 배우는 것이다.
수학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증명은,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논리적 절차에 따라 쉽게 이루어진다. 이렇게 증명된 논리는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아름다운 공식’으로 우리 앞에 등장하여 우주의 법칙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는 아름다운 공식의 세계를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는 ‘빼박’의 증거를 기다리지 않고 심증의 증거, 반증의 증거를 가지고 살아가는 감정의 산물들이다. 증명에 이르기까지는 무수한 갈등과 오해, 그로 인한 불신의 늪을 건너가야만 한다. 그 뒤에 남는 것은 상처와 너덜거리는 가슴들이다. 정의는 실현할 수 없는 담론에 지나지 않으며, 지탄의 대상이 되어 추방당하고 만다.
아무도 처벌하지 못하는, 불가침의 존재, 촉수엄금의 가마를 타고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는 ‘왕’은 누구인가? 정작 잘못을 한 당사자는 밝혀지지 않은 진실 속에 숨어 살거나(학생 도둑), 큰소리 치며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숨어서 비방을 일삼거나(학부모 도둑) 둘 중의 하나로 살아간다. 그러한 가운데 진실에 대한 확신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모호한 현실로 흩어져 버리고, 관련 법망이라는 그물에 걸러진 진실은 비본질적 껍데기로만 존재하는 현실에 퇴색되어 무력화되고 만다. 모든 진실은 그렇게 ‘불법’이라는 더러운 이름을 남기고 전면에서 사라진다. 무결점을 지닌 존재, 그는 학부모의 자식이며 선생의 제자이자 학교의 학생이다. 이제 사건은, 명백한 사실 앞에 모호한 증거로,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입장의 설명을 할 뿐, 드러나지 않는 라쇼몽적 진실에 허덕거리는 진실과 정의의 현존은 이미 자취 없는 뒤안길 신세가 되어버렸다.
유방(流芳)은 백세(百世)하지만, 유취(遺臭)는 만년(萬年)이라고 했던가. 세상은 이미 더러운 자들의 편이었다. 사람이 죽어서야 급여를 올려 받는 너희들은 제정신인가? 그걸 타협이라고 하는 너희들은 제정신인가? 교실에 죄 없는 피해자를 가득 채워 넣어 두었다고 생각한다면, 왕처럼 모시고 들어 날라줄 경찰이라도 너희는 가졌느냐? 언제 내가 너가 될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말을 줄이고, ‘아닥’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너희들은 아는가 말이다.
나는 선량한 조커고 너는 빌런이 된 조커일 뿐, 우리는 모두 조커로 키워지고 있는 이 도시는 고담시가 되어 버린지 오래다.
학교가 버린 오스카가 오히려 학교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으려고 하는 한, 모든 카오스의 열쇠는 오스카가 쥐고 있는 셈이 된다. 한 면을 맞춰 준 노박의 시범을 받아, 오스카는 전체 여섯 면을 모두 맞춘 후 노박에게 큐브를 돌려준다. 결국 이 문제는 아무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 왕이 된 소년, 미래 소년 오스카에게 그들의 미래를 맡겨두는 것으로 감독은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잠정적인 답지 위에 살고있는 지금 여기, 모든 사람들을 위한 답은 어디에도 없다.
먼 나라 독일에서 들려오는 실사판 한국형 학교문제가 아니라, 나는 지금의 한국영화가, 오늘 이 자리의 우리들을 이야기하는, 진짜 한국영화로 돌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는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천만 관객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 숨는다거나, 우유체로 미화시킨 풍자 속에 자신을 가두지 말고, 당당하게 현실에 맞서주기를 바라는 절절한 심정이다. 지금 여기에 필요한 답이 우리에게 필요한 시점이다. 나는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의 자격으로 극장 앞에 서 있다. 우리를 정면에서 말하는 영화를 기다리며 마음에 불씨 하나씩 가슴에 품고, 오늘도 나는 극장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