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근원에 관한 최후의 아이콘
예술의 근원, 예술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미술사에서 만나게 되는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비롯한 각종 구석기시대의 암각화를 통해 우리는 충분히 낯이 익은 스토리로 들은 바 있다. 제천의식에서 기원한 예술의 발생에 대해서도 각종 개론시간을 통해 자자하게 설명 들은 바 있다.
발터 벤야민은 예술을 제의적 가치와 전시적 가치를 가진 것으로 나누고, 과거의 예술이 제의적 가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상태의 연속이었다면 기계장치를 통한 미디어 예술의 경우 순수하게 전시적 가치로 전환된다는 것을 지적했다. 교회음악이 전자에 속한다면, 영화와 같은 신장르가 후자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새로운 기술은 예술품을 무한 복제 가능하게 만들었고, 이 기술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름하여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탄생하는 시대를 연 것이다.
어떤 시인도 독자를 위하지 않고, 어떤 그림도 관객을 위하지 않으며, 어떤 교향악도 청중을 위하지 않는다는 벤야민의 말은 힐마에게 절대적 가치로써 유효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래서 가장 늦게 탄생한 영화는 관객 앞에 ‘전시’(상영)되었을 때 ‘제의’로부터 벗어난 독자적 예술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예술가와 예술작품 그리고 감상자가 제각기로 분리되는 현실을 맞은 것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개념도 여기서 등장한다. 그래서, 힐마 또한 그녀의 작품으로부터 분리될 수밖에 없다.
1862년에 태어난 19세기의 인물, 특히 여성으로서의 삶 속에서 인간을 탐구하면서 부딪히는 각종 사회적 제약과 편견은 그녀로 하여금 금기의 영역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탐구하게 만든다. 그녀에게 심령의 세계 또한 과학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진다. 여동생 안드레아의 죽음이 그녀의 청소년기를 붙잡았고, 이어서 환영을 통해 본 아버지의 죽음도 그녀를 현실로부터 일정 거리를 두도록 만들었다. 소위 말해 유체이탈의 경험을 하게 된 것. 그럼으로써 그녀는 심령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자신이 믿는 이 세계의 진실을 과학의 편에서 신봉하게 만드는 존재, 루돌프 슈타이너박사(인지학과 발도르프 교육의 창시자)를 절대가치로 삼는다. 슈타이너는 인간은 인지할 수 있는 영역 내에서 성장발전한다는 것으로, 교육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인지과정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의 핵심이 바로 인간의 정신영역에 관련된 부분으로 힐마가 심령의 세계에 빠지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힐마의 정신적 스승이 된다.
심령의 세계, 그 높은 곳에 존재하는 마스터들이 지시하는 대로 힐마는 그린다. 자신은 그들의 도구일 뿐이라는 논리다. 이 부분이 현대 추상미술의 핵심을 이루는 논리적 단초가 된다. 소위 자동주의 기법이 탄생하는 순간이다.(이는 문학에서 자동기술법을 설명하는 논조와 유사하다.)
동시대의 칸딘스키보다 몇 년 앞섰다거나, 작업 스타일이 폴락보다 몇십 년 앞섰다거나 하는 것은, 우리가 팔만대장경을 강조하고, 직지심경의 최초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변두리에 지나지 않는 문화유산을 가진 자의 외로운 외침에 지나지 않는 것과 같다. 문제는, ‘힐마’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영화가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에 노출된 존재,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한계에 직면한 존재, 시대(혹은 시간)적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영화는 힐마를 그리고 있다.
시대적 한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로서의 힐마가 강조되는 부분은 중간중간 거리장면이 등장하는 시퀀스를 통해 보여준다. 즉, 흑백사진을 컬러화하고 동영상으로 제작하여 수차례 보여주는 거리의 힐마는, 동 시간대의 사람들과 동화된 그녀는 시대와 시간적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화면을 통해 각인시킨다. 그리고 끝없이 신전 건축을 향한 갈급한 요구는 그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향한 죽음의 길이자, 구도의 길이 된다. 현실과 구도는 예술가로서 힐마의 현실이자 미래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요한계시록)라는 성경의 말은 저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마스터들의 말을 상상할 수 있으며, 그 말은 누구에게도 설명 불가능하며, 그래서 애나만이 유일하게 이제야 알겠다는 내레이션으로 우리에게 들려준다. 세계는 하나이며, 그것은 영원할 것이며, 그것을 표현한 힐마의 그림들 역시 그 영원성을 나타낸 예술로 남을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평생을 바다의 밑바닥을 향해 추를 내려 바다 밑바닥 수심을 탐지하듯, 그녀 역시 이 세계라는 심연, 영혼이라는 심연의 바닥에 추를 던져 넣으며 암흑으로 덮인 세상의 깊이를 재고 바닥 생김새를 탐구했을 것이다. 그 결과가 그녀의 작품으로 남아있다. 그녀의 작품을 통해 나타나는 색깔과 조형은 그녀가 살아생전 ‘그건 환상이나 허구가 아니라 내가 직접 본 것을 그렸다’는 말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일 수 있다. 그녀가 본 것, 그녀가 꿈꾸었던 세계로 넘어가 직접 목격한 것일 것이다. 그건 마치 미켈란젤로가 바윗돌을 보면서 그 속에 신상이 감추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현대미술이 구상을 파하고 추상으로 넘어와, 더 이상 점선면에 구속되지 않은지 오래다. 다양한 퍼포먼스와 첨단기기들이 도구로 활용된다. 물론 전통적인 화구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것을 모사한다거나, 모사품을 통해 유의미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더 이상 신경향을 유행시키지도 않는다.
힐마의 대사 중에 유독 ‘어사인먼트’(assignment)라는 말이 많이 등장한다. 마스터들로부터 부여받은 여러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힐마는 부단히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죽음과 영혼의 세계, 그리고 영혼의 연결을 통해 삶과 죽음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에 나아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힐마의 작품은 20세기 예술의 시작과 끝을 보여준다. 알파와 오메가로서의 예술, 본질에 대한 탐구, 그녀의 영화와 그림이 다시 우리들에게로 온다고 한다. 우린 그녀가 우리에게 부과한 '과제'를 붙들어 안고, 이제 우리는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 무엇을 더 진전시켜 나가야 하는가, 골몰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