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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Sep 24. 2024

차이코프스키의 아내


개봉:2024.05.01.

등급:청소년 관람불가

장르:멜로/로맨스, 드라마

국가:러시아 연방, 프랑스, 이탈리아

러닝타임:143분

배급:(주)엣나인필름

감독:키릴 세레브렌니코프

출연:일리오나 미하일로바(안토니나 밀류코바 역), 오딘 런드 바이런(차이코프스키 역)     

 예술가영화이면서 예술이 없고, 19세기 역사 및 사회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맥락으로써의 배경이 없다. 오로지 한 여자에게 초점을 맞춘 영화다. 그렇다고 이 한 여자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영화도 아니다. 만약에 역사란 ‘현재적 관점에서 재해석되는 역사’라는 카(E. H. Carr)의 관점을 적용한다면, 과연 이런 재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사료는 충분했는지 반문하고 싶다. 그래서, 영화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드라마적 거리를 유지한다. 멀지도 아주 가깝지도 않은, 원경을 다 날려버리고 등장인물의 동선에 충실한 거리감, 이것은 카메라가 등장인물들 옆에 서서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빈틈없이 지켜보겠다는 감독의 시선처리다. 그리고 클로즈업되는 몇 개의 장면들은 극도의 대립을 보여주는 장면들 뿐이다.      

 한 명의 여자로서 천재 음악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보다 오히려 자신의 사랑을 스스로 감당해내야 하는 모순과 거부당하는 격정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비극적 상황을 이미 안고 있는 설정이다. 그것이 음악원 제자로서 그를 존경하고, 그래서 그를 온전히 사랑하고자 마음먹은 한 여자의 운명을 절망의 늪으로 밀어 넣는다. 태생적일 수도, 사회적일 수도 있는 비극의 양태다.

 성 정체성이라는 개념조차 인식 밖에 있었던 안토니나에게 차이콥스키의 내밀한 사생활은 언제든 신이 부여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당당하게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던 그것, 그것이 바로 차이콥스키의 아내라는 의식으로 작용했던 안토니나의 존재의식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차이콥스키의 장례식장에서, 차이콥스키의 시체가 눈을 뜨고 일어나 누가 저런 역겨운 여자를 불렀냐고 주변을 다그치는 장면을 연출하면서 시작된다. 죽어서도 차이콥스키의 거부와 분노는 사라지지 않은 것.

 안토니나의 두 번에 걸친 청혼, 알 수 없는 이유로 신혼생활 중 자신을 떠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안토니나, 납득할 수 없는 이혼사유로 인해 거부하는 이혼 절차, 정부와의 관계에서 낳은 자식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차이콥스키의 아내라는 끈을 놓지 않는다.

 그런 과정에서 그녀의 열정과 자유를 향한 에너지가 춤으로 연출된다, 이것은 그녀의 무절제한 남자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만큼 그녀가 차이코프스키에게서 갈구했던 것은 오로지 ‘사랑’ 하나 뿐이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감독의 인서트이기도 하다.     

 이혼 후 차이콥스키가 모스크바강으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했다거나, 법대시절 동성애자임이 발각되어 친구들이 주관한 비밀재판에 회부되어 명예자살형을 강권 당했다거나,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의 후원으로 경제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게 된 차이콥스키가 안토니나의 곁에 있을 더 이상의 이유가 없게 되었다거나, 차이콥스키의 사인이 콜레라감염이 아니라 비소중독 즉 음독 자살일 가능성이 높다는 1975년의 부검 결과와 같은, 여러 설과 팩트를 감독은 깔끔하게 지워버렸다.

 그래서 어쩌면 이 영화는 새로운 각도의 시선이 아니라 키릴 감독의 일방적 주장에 지나지 않는 왜곡일 수 있다는 편협성을 내포하면서, 19세기라는 종말적 세계 속에 처해있던 한 여성이 어떻게 세계에 녹아 들어가지 못하고 배척되고 마는지, 고독하고 쓸쓸하게 고립되어간 한 여성의 삶을 집요하게 따라가고 있다. 위대한 예술자의 아내가 감내해야 할 시대적 희생을 일정 거리를 두고 담담히 지켜보게 만드는 힘을 가진 영화다.

 그래서 ‘그녀와 그’는 오로지 ‘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한다. 그녀에게 그의 존재가 그랬고, 그에게 그녀가 되어야 할 것, 그것은 ‘오로지 한 사람’의 ’아내‘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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