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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Sep 28. 2024

립세의 사계


형식은

  유화 애니메이션이라는 점과, 1924년 노벨상 수상작인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의 대하소설 ‘농민들’을 원작으로 했다는 점이 놀랍다. 하나는 형식이고 하나는 내용이다.

  왜 이런 형식을 선택했을까에 대한 질문이 나와야 한다. 전통적인 애니메이션은 사실의 세계를 그림으로 그려, 그걸 움직이게 만드는 장르다.(클레이나 모형 같은 도구를 사용하는 확장된 애니메이션에서는 생물이 아닌 사물을 움직이게 만들어 생명을 불어 넣는다.) 그런데, 왜 유화인가? 오일은 채색 재료 중에서 가장 사실에 가까운 질감 표현이 가능하다. 그럼, 여기서 앞뒤 간격을 메울 수 없는 모순이 발생한다. 표현이 단지 실재를 모방하는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냥 고화질 카메라를 사용해서 실재 세계를 촬영하면 그것이 가장 사실적인 결과물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립세의 사계’에서 사용된 유화라는 형식은 사실에 대한 접근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화면을 보면, 배경과 인물이 대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배경은 아름다운 인상파화가의 그림 그 자체로 디테일이 뭉개져있고, 등장인물은 실재보다 더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아름 다운 그림 위에 존재하는 인간들을 더 아름답고, 더 초현실적으로 그려내고자 한 것이다.

또한 어떤 것을 가공(창조)한다는 것은 표현주의적 영역으로 정리하면 표현 욕망을 채우기 위한 인간의 원초적 욕구(호모 루덴스적 영역)를 채우기 위한 활동을 말한다. 이것은 매우 공적이면서 동시에 매우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그래서 원화 제작자에게 왜 하필 ‘유화’ 애니메이션이냐고 물어보면, ‘이게 질감이 좋다.’거나, ‘배운 게 그게 다’라고 답할 수 있고, 답변자가 성의를 가지고 좀 더 나간다면 ‘유화로 뭔가를 이루어 내고 싶었다.’라는 대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표현 그 자체에 목적을 두는 행위를 우리는 순수 예술이라고 범주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고도의 기술을 동원하여 아름다움을 창조해 내는 행위에 속한다. 실사로 찍어 내는 결과물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한 폭 한 폭이 아름다운 그림이 되어 그것이 움직이는 놀라운 영상 그 자체에 그들은 탄성과 환호에 찬 기쁨을 누릴 뿐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닐 것이다. 움직이는 화면 속 어느 장면인들 내 눈앞에 멈추고 싶지 않은 장면이 있으랴! 살아 있는 예술이 내 눈 앞에서 춤을 추는데, 내 둔감했던 예술적 재능이 깨어나지 않겠는가?     


내용을

  이제, 이 지고한 아름다움의 형식은, 추악하고 너저분한 인간 군상들과 만나고, 지배받지 않으려고 투쟁하는 신에 부여한 자유의지에 따르는 인간을 만나고, 그래도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들을 품어내는 배경이 된다.

  아버지(보리나)와 아들(안테크)의 갈등(이건 전쟁이다.)이 벌이는 재산 싸움에서 한 여자(야그나)를 공유하는 사랑 싸움에 이르기까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동양의 유교사상에 젖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 본연의 욕망 구조를 적나라하게 표출한다. 여기에 마을사람들의 광기까지 합세하여 돌이킬 수 없는 욕망구조의 집단화가 형상화된다.

 야그나가 주인공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폴란드의 역사를 중심으로 보면, 사실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오랜 신화적 소재다. 마을사람들이 지켜내려고 힘을 합쳐 대항하는 숲은, 분할 되는 폴란드국가를 상징한다. 폴란드의 1800년대 말은 그야말로 외세에 의해 국토가 분할되는 외세의 간섭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굴종의 시기에 해당한다.(폴란드는 동유럽 전체를 아우르던 국토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5차에 걸쳐 주변국에 의해 분할되면서 국가는 외세의 괴뢰정부에 의해 종속되고, 피지배라는 수모의 역사를 오랜 기간 가지게 된다.)

  마을 내부에서 일어나는 한 집안의 갈등과 마을 사람들의 분열과 갈등은 폴란드 민속과 신화적 풍습을 관통하면서 전개된다. 그러한 갈등은 시기와 질투 욕망과 절망이라는 인간본연의 감정을 여과 없이 노출시켜 보여준다. 결혼식 장면, 마을 축제에서의 민속춤 장면, 짐승의 탈을 쓰고 동네를 도는 난봉꾼 놀이 등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카니발적 요소들이다. 놀랍게도 이런 광기 어린 제의적 요소들의 마지막 모습 또한 같은 장치로 처리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집단적 조리돌림이 그것이다. 이로써 야그나의 운명은 종지부를 찍는다. 야그나는 마을의 가뭄을 해결하는 제의적 희생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야그나의 운명이다.

  제의의 희생물인 야그나가 마을 사람들에게 저주가 될지, 어떤 또 다른 미래를 초래할지 모른 채 영화는 벌거벗은 야그나의 살아 돌아오는 눈빛으로 막을 내린다. 마을 밖의 야그나라는 존재는 마을사람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수호신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그것은 폴란드의 역사가 반증하는 사실이다.      


아름다운 그릇에 담아내고

  폴란드의 시련과 고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옛 영토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이 시점은 분명 폴란드인에게는 고난의 연장에 있는 것임에 틀림 없다. 40년대 영국의 폴란드 망명정부가 90년대의 바웬사정부에게 전권을 이양하는 모습은, 마치 우리에게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된 독립국가가 독재정권임을 내세워 귀국을 거부하고 해외 투쟁을 계속하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귀국하여 전권을 이양하는 모습과도 같은 것이다. 그만큼 폴란드인들은 강인한 의지와 투쟁의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 면에서 망명한 쇼팽이 조국을 위해 작곡한 에튀드는 폴란드인들의 애국심을 상징한다. 예술이라는 도구의 목적이 그렇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쇼팽은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소임을 다 한 것이다.     


그림의 한가운데 아버지와 아들

서로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살기등등하던 아버지와 아들은 지주의 벌목꾼, 경비병들과의 싸움에서 다시 만난다. 이 싸움은 마을 전체가 외부 세력에 대항하는 싸움이다. 싸움의 선봉에 아버지 보리나가 서 있다. 아들 안테크의 총구는 아버지를 향한다. 아버지가 지주에게 공격당하는 것을 목격한 아들의 눈에 불꽃이 튀어 오른다. 여기서 비로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만고의 진리가 실현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부자유친’이 실현되고, 집에서 쫒겨나고 마을사람들에게도 배척되었던 아들 안테크가 마을의 의사결정의 중심에 선다. 즉, 마을 공동체의 중심에 보리나 집안의 남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릴 것 같은’ 립세 마을의 혼잡한 이야기 중심에 이들 부자의 권력 이양이 공고히 되는 과정이 펼쳐지는 것이다.      

마을사람들을 배경으로 보리나 집안의 이야기, 그들 모두가 지주에 맞서는 이야기, 이 모든 전면에 빛나는 존재로 서 있는 단 하나의 인물 야그나는 분명한 미쟝센 구조를 만들어낸다. 일그러진 욕망구조를 뒷배경으로, 보리나 부자의 충돌이 불거져 나오고, 마침내 지옥 같았던 낙원을 잃어버린 야그나가 등장한다. 모든 장면이 비극 아닌 장면이 없다. 이런 비극을 따뜻하고 강렬한 색채로 붙잡아 두고 감싸는 것이 이 영화의 형식, 유화 애니메이션이다.      


그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

  처음에 했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 영화의 형식이 내용에 어떤 작용을 했으며, 어떤 기대효과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제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 영화의 애니메이터들이 추구한 바가 될 것이다. 인간의 의식 안에는 미뿐 아니라, 추 또한 아름다움으로 인식되는 것, 현실이 추하고 더러운 진흙탕이라면 그것 또한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의 영역이라는 인식은 인간을 신의 영역에 데려다 주는 미학, 예술의 영역인 셈이다. 신 앞에서 미추의 구분은 무의미하며 그래서 예술 또한 미추를 가리지 않는다.

  사랑 앞에 눈먼 부자의 다툼, 이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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