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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Sep 28. 2024

라이즈

지금 당장 일어서야 하는 이유


개봉: 2024.01.17.

등급: 15세 관람가

장르: 코미디, 드라마

국가: 프랑스, 벨기에

러닝타임: 117분

감독: 세드릭 클라피쉬

주연: 마리옹 바르보(엘리즈 역)

출연: 메디 바키, 호페쉬 쉑터, 프랑수와 시빌, 피오 마르마이, 수헤일라 야쿱, 뮤리엘 로빈, 드니 포달리데스, 알렉시아 지오다노, 마틸드 와니에, 아가트 베르망, 지네딘 수알렘, 다미앙 샤펠

제작: 세드릭 클라피쉬, 브뤼노 레비

각본: 산티아고 아미고레나, 세드릭 클라피쉬

촬영 알렉시스 카비르친

음악: 토마스 방갈테르, 호페쉬 쉑터

편집: 앤-소피 비옹

미술: 마리 케미널

의상/분장: 앤 쇼테, 코리니 보수, 스테파니 셀바

캐스팅: 콘스탄스 데몬토이

배급: ㈜무비다이브

수입: (주)퍼스트 런      

    

  프랑스판 원제는 ‘En Corps(In Bodies)’로 되어 있다. ‘몸으로, 단체로’라는 뜻이니 단순 번역으로는 영화의 제목으로 마뜩잖다. 좌절에서 ‘일어서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제목을 ‘rise’로 정한 것은 그래서 매우 적절했다.      

  스물여섯 살, 엘리즈는 발레단 소속 수석 무용수다.(마리옹 바르보는 실제로 파리 오페라발레단 소속의 수석 무용수다.) 그녀는 같은 발레단의 남자 무용수와 사랑에 빠져 있다. 자신이 등장할 막 뒤에서 남자친구의 배신을 목격하면서 모든 사건은 시작된다. 발목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은 엘리즈는 수술을 하게 되면 약 2년간 발레를 못할 것이라는 발레리나로서는 사망선고와도 같은 진단을 받는다. 한참 절정을 향해 치달릴 나이니까.      

  엘리즈는 한순간에 인생의 중심을 잃어버린다. 사랑과 일, 사랑으로부터는 배신당했고 일은 못 하게 되었다. 하나는 엘리즈를 정신적 불구로 만들었고, 다른 하나는 그녀를 육체적 불구로 만들었다. 6살 때부터 발레를 해온 자신에게 아버지는 ‘거봐라, 내가 법을 공부하라고 했지  않느냐?’며 힐난도 아니고 조언도 아닌 가뜩이나 심난한 엘리즈의 가슴에 불을 지른다. 감성이 없는 극히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법을 전공한 아버지다.     

  시골 민박에 푸드카 영업을 하러 가는 친구 커플을 따라나선 엘리즈는 거기서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현대무용, 그것은 발레에서 가져보지 못한 자유로움을 준다. 전통의 고결함에 갇힌 발레의 형이상학적 예술관이 현실의 안목에 눈을 뜨게 만드는 현대무용의 자연합일의 예술관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 현장에서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 가슴이 뛰고 셀레는 사랑이 다시 시작된다.     

  친구 커플이 보여주는 싸움의 일상, 만감이 교차하는 물리치료사의 상황과 감정, 이런 것들이 이 영화의 재미를 한층 더 해 준다. 현대무용팀이 나가고 교회 성가대가 들어와 가스펠이 연주되는 상황에서 창밖 마당의 셰프가 보여주는 코메디는 이 영화의 진지함을 무너뜨리는 압권이다. 바닷가 석양과 함께 부는 바람에 나부끼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자연이 만드는 예술이다. 발레가 만들어내는 동작과 선율에 맞춘 몸의 움직임, 이런 것들이 절제된 예술미를 보여준다면, 이들 현대 무용수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자연과 합일하는 교감의 조화미를 보여 준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조화와 포용이며 상생의 관계이다. 인간사회도 그 자연의 일부일진대 자연의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 모습이 추의 영역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미움이 사랑에 지고 마는 것처럼, 우리도 자연앞에 무릎 꿇어야만 하는 운명인 것을 안다면, 지금 일어서야만 하는 이유로서는 충분하다고 보겠다.

  

  예술이 담고 있는 미추의 영역은 아름다움이 마치 아름답지 않은 것과 대척에 있는 것같은 구분을 짓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 영화는 말한다. 미와 추는 미적 가치의 일정 기준을 중심으로 서로 반대가 되겠지만 둘 다 예술이라는 점에서는 아름다움의 영역에 포함된다. 그런 면에서 사랑과 미움 역시 마찬가지다. 이 둘 역시 서로 반대인 감정으로 보여지겠지만, 사랑은 미움을 포용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사랑의 승리를 보여준다. 아버지가 흘리는 눈물에서 그렇고, 엘리즈가 새로운 사랑에게로 달려가 서로 맞닥뜨리는 그 환희의 순간에 더 이상의 미움은 없는 것이 된다. 선악의 문제 역시 그렇다. 보다 더 큰 선이 악을 포용한다. 그래서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답고, 조금 더 즐겁고, 조금 더 이상적인 쪽으로 나아가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정신이, 이런 영화를 만들고, 이런 영화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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