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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Sep 30. 2024

비닐하우스

애비의 한국판, 문정


  켄로치의 ‘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에는 주인공 리키뿐 아니라 재택 간호사 직업을 가진 그의 아내 ‘애비’가 나온다. 만약에 이 영화의 속편이 나온다면, 그건 애비의 이야기가 될 것이고, 그건 이솔희 감독의 ‘비닐하우스’가 될 것이다.

  가정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 택배기사직을 시작한 리키의 삶이 어떻게, 얼마만큼의 고통으로 점철되는지 ‘미안해요, 리키’가 잘 보여주었다면, ‘비닐하우스’는 그 가정이 깨진 상태에서 모종의 범죄로 인해 지금은 보호시설에 들어가 있는 아들과 함께 살고 싶은 어머니 ‘문정’의 삶을 보여준다.


  ‘문정’이 이미 충분히 ‘고통받은 자’임을 영화의 첫 장면은 그대로 보여준다. 정상적인 가옥에서 멀어진 가건물 비닐하우스에 살고있는 문정이 자신의 뺨을 스스로 때리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박한 희망, 아들과 아파트에서 살고 싶은 현실적 희망을 품는 문정,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정신적 불안을 정상으로 돌려놔야 한다. 복지혜택으로 무료 심리치료를 다니게 되면서 같은 피상담자 ‘순남’과 친분을 쌓게 된다. 연민이다. 고통의 분담,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


  이 영화의 빛나는 상상이 발휘되는 부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돌보는 피요양인은 여성 치매 노인이다. 이 치매 환자의 남편이 전직 교수이며 어떤 알지 못할 이유로 시각장애인이 되었다는 설정, 이것이 이 영화를 연민에서 괴기로 분위기를 전환시킨다. 제정신이 아닌 치매환자와 제정신이지만 눈뜬 장님이 함께 살고 있는 가정, 시종일관 무표정하게 지친 얼굴의 요양보호사 문정이 환자를 돌보는 사이, 시각장애인 남편 역시 치매 판정을 받게 된다.

  문정은 여전히 치매노인으로부터 침뱉음을 당하고, 아들 가족과의 영상통화에서 자신을 죽일 거라는 치매노인의 외침을 들어야 했으며 꿋꿋하게 자신의 일을 수행해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치매노인 아들과의 통화를 통해, 시각장애인 노인과의 대화를 통해 조만간 노인 부부는 요양원에 들어갈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고, 문정은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겨 난처한 상황이 될 것을 예상한다. 아들이 시설에서 나오면 아파트에서 같이 살 수 있을 거라는 계획이 틀어져 버리는 것, 수입이 끊기면 ‘비닐 하우스’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치매노인이 가하는 폭력을 피하고 진정시키려다 치매노인이 넘어져 죽게 된다. 사고사다. 사고 신고를 하는 순간, 핸드폰 화면이 순간적으로 바뀌며 아들로부터 전화가 오고, 아들은 퇴소해서 엄마와 함께 살고 싶다고 한다. 문정의 희망이 갈림길에 선 순간이다.

  문정은 돌아올 아들을 위해, 치매노인의 사체를 비닐하우스 케비넷에 숨긴다. 그리고 치매노인의 자리에 자신의 어머니를 데려다 앉힌다, 놀랍게도 자신의 어머니 또한 치매노인이다. 그래서 문정의 삶은 불행의 중첩, 자신의 가족은 돌보지 못하는 요양보호사의 현실, 노동자가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되는 자본주의의 몰인간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그래서 현실은 비극이다.

  치매노인의 남편은 자살을 준비한다. 자신까지 치매에 걸려 언제 자신이 아내와 같은 삶을 살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과 걱정이 부부 동반자살을 선택하게 만든다. 그는 자신이 목조르는 아내가 자신의 아내가 아님을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의 목을 조르는 것은, 자신의 치매 증상이 심하게 발현되었다고 믿고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내가 아닌 여자가 죽어 있는)현실을 현실이 아니라고 믿는 이유가 자신의 정신상태에 대한 불신때문이라는 역설의 역설을 보여준다. 이런 스토리의 대 역전극은 도대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 천재적 이야기꾼만이 가질 수있는 재능이다.

  그렇게 하나의 불행이 생을 마감한다. 동시에 문정의 불행중 하나도 사라지게 된 셈이다. 자신을 눌러온 삶의 무게가 하나 사라진 것이다. 이것은 불행인가, 행복인가.

  치매노인의 시체만 없어지면 아무 문제 없이 아들과 아파트에서 살 수 있다고 믿는 문정은 아파트를 계약하고 비닐하우스를 불태운다. 그러나 마지막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돌아본 문정의 눈빛이 순간 돌변한다. 영화 내내 초점 없는 희미한 눈빛을 유지했던 문정이 최초로 달라진 눈빛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동시에 동물적으로 꿈틀거리는 몸짓은 문정의 고통이 최고조에 달하는 절정의 순간을 보여준다. 그리고 비로소, 마치 울음처럼 참았던 음악이 터져나오며 엔딩이 올라간다.


  인간이 현실에서 겪어내야 하는 고통이 어디에까지 이를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켄 로치’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의 아내 애비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을 지키는 두 개의 축, 남편과 아내의 축이 이렇게 무너지는 현실을 우리는 살고 있는 것, 우리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두 영화를 비교해서 감상하면 좋을 것이다. 답답한 현실, 어디에서도 도움을 주지 않는 현실, 심지어 가족까지도 짐덩어리로 전락해버린 살인적인 현실, 그 한복판에서 리키는 아내 애비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는 게 이렇게 힘든 줄 몰랐어.”   

  

  이 영화에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스토리의 치밀함에 있다. 그걸 발판삼아 도약해나가야 한다. 멀리 뛰고 더 높이 뛸 수 있는 가능성이 거기에 있다.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아직 빈 캔버스로 남아 있는 그림, 마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완성된 집, 영화 그림상 치밀하지 못한 부분들이 전반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  영화 기술적 표현에 더 치중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감독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설정한 마지막 장면의 설명을 듣고 배우 김서형이 만들어냈다는 놀랍고도 가슴 벅찬 엔딩은 독립영화사에 길이 남을 엔딩이 될 것이다. 말로 들은 것 이상의 연기를 하는 사람, 그들이 진짜, 연기자다. 또 하나, 이 영화에는 연식이 오래된 연기자들이 다수 등장하는데, 이 또한 감독의 말에 의히면 기성 배우들을 좀처럼 쓰려고 하지 않는 독립영화의 관행을 깼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성 배우를 기용한 것을 잘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를 디렉션하면 열에 스물을 알아듣고 척척해 내는 내공을 가진 연기자들이라는 것, 그래서 TV를 통해 본 노익장을 과시하는 그들의 얼굴과 연기를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다는 점도 관람 포인트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신예, 순남 역의 ‘안소요’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그의 분신에 빠지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어 앞으로 어떤 작품에서 그를 만날 수 있을지 기대가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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