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이라 슬픈 현실
부부를 가리켜 삼생의 연이 맺어져 있다고 말한다. 이를 삼생지연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부부의 연은 깊고도 오래다. 그래서 한번 맺은 연은, 한 번의 생에 그치지 않는다.
열두 살에 맺은 두 사람의 인연은 12년 후 스물 네 살에 재회하게 하고, 한번 더 12년이 지난 서른여섯에 이들을 다시 만나게 만든다. 미국에 있는 나영과 한국에 있는 해성은 그렇게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스쳐 지나간 흔적을 찾아 나서는 것은, 추억에 대한 회상에 근거한다. 각인된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시간에 소환되었을 땐 특별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경우에 해당한다. 해성은 페이스북을 통해 12살 때 헤어진 친구를 찾고 있었고, 이에 응한 나영은 화상 채팅으로 해성을 다시 만난다.
12살 때의 캐나다 이민이 이들을 갈라놓은 것. 해성의 그 무엇이 나영을 다시 찾게 만든 것일까? 한번 맺어진 인연은 절대 끊어질 수 없다는 불가의 연기설에 바탕을 둔 스토리 전개다. 둘은 얼굴을 보고 말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와 시간 차를 가지고 있다. 문명의 이기가 그 간격을 채워주긴 하지만, 극복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다시 이들은 헤어진다.
이들이 또다시 만났을 땐 나영이 이미 미국인 작가와 결혼한 유부녀 때다. 돌이킬 수 없는 현실적 관계 속에 이들은 구속되어 있다. 해성의 현실은 출구 없는 좌절과 절망이고, 나영이 깨어난 현실은 비통한 눈물뿐이다. 그래서 이 둘이 마주한 이승의 현실은, 연의 마지막-이별이다.
스치는 만남에서부터 시작된 세상 모든 인연의 종결, 슬픔을 만들어 낸다.
나영의 남편인 미국인 아서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이방인이 되어버린 소외감으로 가득 차 있다. 외모와 언어, 그 어떤 것도 동질감을 공유하지 않은 자신을 확인한 아서는 끝없는 나락의 감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와는 정반대로, 해성과 나영은 아무리 오랜 시간 동안 어ㄸᅟ건 제약이 이들을 갈라놓아도, 떨어져 있었던 시간만큼 서로를 끌어당기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인연이 운명이 되는 순간이다. 운명 안에서 이들의 반대편에 서서 그렇게 떨어져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 아서에게는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이 둘에게는 스며들어 있다.
정체성의 인식, 깨달음에서 오는 모종의 믿음이 이 둘에게는 있는 것이다. 현실적 제약이 주는 슬픔을 겪어 낼 수 있는 힘이 바로 이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정체성이다. 부부보다 앞선 그것은 혈통일 수도 있겠다. 셀린 송 감독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은 연기설에 기대고 있다.
'나'라는 존재가 관계로 엮인 절망을 깨닫는 순간,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한 잎 베어 물고 삼킨 순간처럼,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고, 자신과 상대와의 관계가 더욱 선명해진 걸 목격하는 순간, 남겨진 여자는 울기 시작하고 남자는 자신이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지금이 전생이라면, 우린 다음에 어떻게 될까?
불가에서 말하는 모든 인연의 종말은 열반으로 끝난다. 이 사바세계의 모든 인연, 인과, 업보를 끝장내는 것은 붓다, 깨달음의 세계인 열반밖에 없는 것이다. 열반은 완벽한 죽음이다. 그러나, 해성은 다음 생에 나영을 다시 만나기를 기약한다. 삼생의 마지막 연이 남았다고 해성은 믿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한없이 길고 쓸쓸하다는 것을...
고요한 영화다. 뜨거운 불덩어리를 감추고 고요한 척하는 수면을 보여주는 영화다. 사랑도, 애절함도, 고통도, 슬픔도, 동요하는 나영의 손가락과 요동치는 마음을 숨긴 채 무표정하게 현실을 응시하는 해성의 눈빛은 이 영화가 나영과 해성의 이별만큼이나 긴 장고의 산물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슬픔도 힘이 될 수 있다면, 퀴퀴한 현실에 색을 입혀 우리 생을 더 아름답고 빛나게 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