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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Oct 09. 2024

카일리 블루스, 노변야찬

길을 달려가다

       


감독  비 간

각본  비 간

제작촬영편집

음악  임 강

수입사  찬란

배급사  찬란

개봉  2023년 5월 24일

상영 시간110분

상영 등급12세 이상 관람가



  원제는 노변야찬(路边野餐, 길가 소풍), 로드무비적 제목이다. 영어제목 카일리는 감독의 고향이자, 극의 배경이 되는 지명이다.     

  시네필 세대라고 하는 중국 8세대 대표주자 비 간의 2015년 작품이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佛告須菩提 爾所國土中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何以故 如來說諸心皆爲非心 是名爲心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많은 나라에 있는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가 다 아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한 모든 마음이란 모두가 마음 아닌 것을 설함이며 그 표현을 마음이라고 하기 때문이니라. 무슨 까닭이겠느냐? 보리여, 과거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찾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찾을 수 없느니라."(번역출처: 불교신문)     

  금강경 18장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이다. 중생이 말하는 마음은 진짜 마음이 아니라는 설법이다. 영화에서 말하는, 혹은 주인공 첸이 경험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한바탕 꿈과도 같은 것으로 '허사'라는 전제를 깔고 스크린 세상이 열린다.

  

  1. 무얼 말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영화다.     

  남에게 쉽게 말할 수 없는, 달갑지 않은 과거를 가진 첸은 9년간 감옥생활을 한 전과자이자, 카일리 마을의 의사 보조다. 또한 그는 시집을 출간한 시인이기도 하다.     

  그가 동생의 아들(조카, 웨이웨이)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난다. 어머니 같은 의사 동료가 그에게 추억의 물건을 준다. 자신의 옛 애인에게 물건을 전달해 달라는 것(노래 카세트 테이프 1개, 남방 셔츠 한 벌, 사진 한 장) 조카를 찾으러 가기 위해 기차, 오토바이, 배 온갖 운송수단을 이용해 전위안으로 향한다.     

  결국 종착지에 도착한 첸은 조카 웨이웨이를 데리고 있는 형님(과거 그의 아들을 죽인 조폭에게 복수하고자 했을 때 함께 해 준 형님, 중국인들은 형벌의 하나로 손가락을 자르거나, 손목을 자르는 행위가 흔한 일인 듯 하다. 첸의 대사에서도 드러나는 이러한 사실은 단지 영화적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서 문화적 충격을 준다.)을 만나 웨이웨이가 안전하게 학교를 다니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스토리는 끝난다.     

  이런 스토리는 대단히 구전문학적 특성, 즉 신화 민담 전설을 망라하는 설화적 요소를 바탕에 두고 있는 이야기 구성방식이다. 일정한 목적을 가진 주인공이 각종 험난한 과정을 거쳐 미션을 완수하고 목적물 혹은 목적지에 도착해서 임무를 완수한다는 그런 종류의 스토리 구조다. 이 구조는 독자 혹은 관객들에게 신비로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2. 시계, 운송도구(기차, 오토바이, 배), 시간의 혼재라는 형식의 의미     

  시간을 실어나르는 도구는 당연히 운송도구들이다. 그래서 이 둘은 불가분이다. 기차는 환상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도구다. 배는 이 쪽과 저 쪽의 강안을 연결해 준다. 배로 연결되는 시간은 과거와 현재일 수도, 현재와 미래일 수도 있다. 카일리는 현재를, 전위안은 과거를, 당마이는 그 중간적 존재로서의 환상의 공간을 상징한다. 그래서 오토바이는 오지 않은 현실, 미래를 향하는 도구이자, 갈 수 없는 과거로 돌아가는 도구다.     

  인간이 벽에 그려 놓은 시계는 항상 그 자리에 멈추어 있다. 이것은 현재의 시간이다. 반면, 그 위에 못을 박아 해시계가 된 그 시계는 과거를 향해 빠르게 움직인다. 세상의 모든 시계는 미래를 가리킬 수 없다는 것. 시계에도 현실과 실재, 그것이 만들어내는 환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마음'과 같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3. 공간, 현실과 허구(카일리와 전위안)     

  첸의 고향은 전위안이다. 그곳은 어머니의 땅이었고, 나의 땅이기도 했다. 출감 후 첸의 거주가 달라지며 고향을 떠나온 것이다. 첸은 다시 어머니의 땅이자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 공간의 간극에 시간이 있다.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 여기와 저기 사이에 메꿀 수 없는 틈, 그것이 바로 시간이다. 불가능의 간극이며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이다.

  그 틈 사이에 강이 흐른다. 배는 강을 따라 이리저리 맴돈다. 그 강의 이름은 '레테'일지 모른다. 그 강을 건너는 행위는 그래서 진실(Aletheia)을 찾아가는 여로다. 물속에 빠져 죽은 존재들이 하나씩 살아난다. 그런 비현실적 공간이 '당마이'다.     


  4. 원테이크의 쇼크, 원시인     

  영화전반부부터 원시인의 존재를 언급하면서, 원시인은 점점 가시화, 현실화된다. 원시인은 아마도 괴물과도 같은 존재로 짐작된다. 뒤에서 나타나 껴안고 떨어지지 않는 존재, 알콜중독이라고 하는 땡추도 원시인에게 당한 듯하다.     

  공포의 대상 원시인이 원테이크와 함께 등장한다. 화면은 마치 gta 게임 속에 들어온 듯 몰입감을 준다. 한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괴물 원시인, 그가 '당마이'에서 사람들을 쫓아 다닌다. 그게 롱테이크로 나타난 것. 생사불명의 과거의 아내를 만나고 성장한 미래의 웨이웨이를 만나는 공간, 과거와 미래가 만나 현재를 이루는 공간이다. 그 곳은, 전위안과 카일리 사이, 중간계의 공간, 이렇게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공간, 꿈 밖에 없다. 첸 자신이 원시인에게 쫓겨 다니고 있음과 동시에 첸은 원시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주객의 교체로 인한 흔들림의 시점을 화면은 그대로 보여준다.     

  원시인은, 중국의 현대사에서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마오정부이며, 현재의 시정부다. 중국공산당의 보이지 않는 몸체, 사람들을 공포에 휩싸이게 만드는 존재, 어디에도 실체는 없지만 끊임없이 소문과 보도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존재, 중국인들에게 있어서도 때 늦은 체제적 이념적 ‘광장’의 개념이 정립되고 있는 듯하다.    

 

  5. 시의 기능     

  소설은 서사의 문학이다. 즉, 이야기에 기초해서 플롯을 짜는 양식인 것이다. 거기에는 일정한 시간의 흐름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소설은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을 반영하는 양식이 된다.     

  그러나, 시는 그렇지 않다. 시공을 초월하는 장르가 '시'다. 시는 마음과 감정을 따라간다. 이야기를 따라가는 소설이 시공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시는 그로부터 무한히 자유롭다. (전통적으로 동양은 시가 지배한 세계였다. 그러고 보면 그리스 신화도 시였지 않은가?)     

  '마음'에 대해 영화 초입에 금강경의 글귀로 그 뜻을 제시하고 있다. 불가에서는 마음은 없는 것이라고 정의한 부분이다. 없는 것을 표현(형상화)할 뿐, 따라서 그 표현조차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설파하고 있는 것, 없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공허한 것이냐는 말이다. 즉, 과거와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라면 현재 역시 존재하지 않는 공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없는 것을 말할 수는 있으나, 없는 것 자체를 보여줄 수는 없다. 없는 것을 어떻게 보여준단 말인가. 언어의 허위성, 화려한 수식에 지나지 않는 그냥 말일 뿐이다. 원인이 없는데, 어떻게 결과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건 그냥 말일 뿐이야, 네가 여기에 있든, 저기에 있든,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냥 말일 뿐이야.     

  이 영화는 아주 자주 비 간 감독의 자작시를 읊는다. 모든 시간의 간극을 메우는 용도이다. 그것은 동시에 공간의 간극을 메우고 있기도 하다. 시의 진실함은 모든 헛된 것, 공된 것의 빈 곳을 채워서 인간에게 참된 뜻을 전달하는 가장 고귀한 진술방식인 것이다.(사무사(思無邪)/시삼백편을 한마디로 말하면 '생각에 간사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시를 따로 읽어 봐야겠지만, 아마도 그 의미가 크게 중요하게 작용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의 시가 대단히 난해하기 때문이다. 난해하다는 것은 각종 이질적인 이미지들의 조합으로 쓴 모더니즘 계열의 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매우 주관적인!     

  이걸 단순하게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이제 중국인들에게 주관주의, 서정시의 시대가 왔다. 그것의 의미는 전체주의 노선, 공산당에 대한 반란이 개개인의 마음속에 불붙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 표현이 더 상징적으로 고도화되는 것은 그들의 진짜 속내가 더 내면으로 깊이깊이 숨어들고 있다는 것을, 그간의 중국사회상이 반증하고 있다.


  그래서, 노변 야찬의 여정은 계속되어야한다. 중국의 현대화는 개인화를 뜻 하기도 한다. 다른 말로는 민주주의가 될 수도 있다.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는' 말뿐인 설화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 구추되는 세상을 볼 날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중국 영화들은 말하고 있다. 문학과 영화, 예술이 살아났던 그 시절의 감독들이 지금 다시 소환되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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