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겉표지를 바라봅니다. 붉고 거친 배경에 이글거리는 눈빛의 여우. 그 옆 까치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하지만 막상 여우는 괘념치 않아 보입니다. 이 둘은 대체 무슨 관계일까요.
화마 속 날개를 잃은 까치. 그 까치를 불 속에서 구해낸 한쪽 눈을 잃은 개. 이들은 서로의 눈과 발이 되어줍니다. 어느 날, 여우가 나타납니다. 이 둘의 공생을 눈여겨보고 있지요. 여우가 자신의 망가진 날개를 바라보고 있음을 느낀 까치는 불길한 기운을 느낍니다. 까치는 개에게 그 여우를 조심하라고 말하지만 의심할 줄 모르고 이타적인 성향의 개는 의심 없이 그 여우를 자신이 사는 동굴로 받아들입니다.
까치는 사고로 얻은 깊은 트라우마 그리고 날지 못함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천성이 예민하고 자신의 아픔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지요. 이런 까치의 마음을 읽은 여우는 개보다는 자신이 더 잘 도울 수 있다고, 날게 해 줄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한 번, 두 번... 까치는 여우의 유혹을 거절합니다. 자신을 불 속에서 구해준 개를 배신할 수 없다는 마음이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까치가 여우에 대한 의심을 계속 표현하자 개가 “그만해”라고 까치에게 말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받지 못해서였을까요. 까치는 세 번째 유혹에 잠자고 있는 개를 뒤로 하고 그렇게 여우를 따라나섭니다.
여우는 까치를 등에 얹고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까치는 스스로 하늘을 나는 것 같습니다. 한참을 달려 뜨거운 사막에 도착하자 여우는 까치를 땅으로 떨구며 “너도 외로움을 느껴봐” 말하고는 떠나버립니다. 여우는 까치에게 우정 따위를 바란 것이 아니라 그저 개와의 유대관계를 망치고 싶었던 것이었지요. 타 들어가 듯 뜨거운 대지 위에 혼자 남겨진 까치는 그냥 죽는 것이 쉬울 것 같습니다. 그때 저 멀리에서 여우의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승리의 기쁨'인지 '절망의 외침'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까치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 자신이 떠나버린 것을 알게 됐을 개를 생각합니다. 까치는 다시 일어나 어렵게 한 걸음 씩 개가 있는 그곳을 찾아 떠나며 열린 결말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다시 돌아온 까치를 개는 받아들일까요? 까치를 죽을 듯 뜨거운 사막에 던져 놓고 떠나 버린 여우는 왜 사막 한가운데서 울었을까요? 승리의 기쁨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을 향한 자책과 절망의 울부짖음이었을까 궁금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합니다. '까치와 개'의 관계를 보면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하나의 완전한 존재로 살아가고픈 인간의 욕망을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엄연히 다른 두 객체이기에 각자의 성향과 욕망이 다른 법이지요. 서로를 이해하고 잘 맞춰가고자 노력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여우'와 같이 누군가를 흔들어 균열을 일으키고 그 안에서 기회를 찾는 존재를 인생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상대에게 본능적인 결핍이나 욕구불만이 있는 상황이라면 그 유혹은 더욱 달콤하게 느껴지겠지요. 예전 같으면 개를 배신하고 여우 등에 올라타 떠난 까치를 어리석다 하고 말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아픔 속에 깊이 빠져 있던 까치가 본능적으로 의심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여우를 따라나선 것을 보며, 까치의 잃은 것에 대한 절박함이 보입니다. 남에 대한 의심 없이 너그럽고 수용적인 개는 너무 세상 모르는 바보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쪽 눈을 잃고도 삶의 의지를 잃지 않았고, 오히려 까치에게도 삶의 감사함을 강조해서 말합니다. 개는 그렇게 살아가는 방법을 어렵게 배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림책을 선호하는 편은 아닙니다. 이미지로 그 상황이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으니 되려 제 스스로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을 놓치는 기분이라서 말이지요.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그림책의 강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봅니다. 이미지를 통해 글의 상황이 더욱 분명하고 실감 나게 전달됩니다. 덕분에 각 캐릭터의 감정선을 좀 더 세밀하게 느껴 볼 수 있었습니다.
호주 출신의 작가 마가릿 와일드(Margaret Wild)의 변 또한 인상적입니다. 각 등장인물의 대사를 단정하지 않게 페이지의 모서리 아니면 그림의 한 중간 등 무작위로 넣어 독자의 가독성을 의도적으로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독자가 그저 흘러가듯 스토리를 읽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그 행간을 생각할 시간마저 고민하고 배열한 작가의 섬세한 기획력이 놀랍습니다. 삽화 또한 여러 가지 소재들을 활용해 거친 생동감을 불어넣는데 애쓴 흔적이 보입니다. 두 작가가 원하는 메시지 전달을 위해 나눈 소통의 깊이를 짐작해 봅니다. 열린 결말로 독자가 충분히 상상하고 생각해보게 할 기회가 주어진 점도 참 좋습니다.
짧은 이야기 속에 많은 가치와 생각할 거리를 녹여낸 그림책 <여우>. 한 번쯤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 그림동화책 <여우> 마가렛와일드, 파랑새출판사 Fox, Margaret Wild, Ron Brooks
* 여우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