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로원에 모신 유일한 혈육,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를 치루지만 모정에 대한 그리움, 헤어짐의 슬픔 등을 주인공 '뫼르소'에게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장례식은 형식일 뿐, 그에게는 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식욕도 그저 배고프니 먹는 사람이고, 직장에서 진급을 시켜준다고 해도 관심이 없습니다. 알제리의 뜨거운 햇볕 그리고 바다 수영할 때의 자유로움을 즐깁니다. 장례식 다음날, 해변을 즐기고 밀크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웁니다. '마리'라는 여인을 만나 코미디 영화를 보고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일반적인 모친상 직후 아들의 일상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마리가 자신을 사랑하는가 묻지만 뫼르소는 그 감정이 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웃인 '레몽'은 포주역할을 하는 반 사회적인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뫼르소는 그런 그와 별 편견 없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뫼르소는 레몽에게서 도망간 애인을 설득하는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을 받고 대필합니다. 레몽은 그 편지를 받고 애인이 돌아오면 복수하겠다고 벼르는데도 말이지요. 결국 돌아온 애인에게 레몽은 폭력을 행사하고 경찰에 끌려갑니다. 폭행으로 그 여성의 비명 소리가 들리지만 뫼르소는 말린다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폭력을 당한 여인의 오빠가 아랍계 무리를 이끌고 레몽과 뫼르소 앞에 섭니다. 레몽이 공포에 총을 꺼내 들지만, 뫼르소는 자신이 돕겠다며 그 총을 대신 건네받아 들지요. 긴장의 순간이 지나고 바람을 쐬러 홀로 해변에 나선 뫼르소는 그 여인의 오빠와 홀로 다시 마주칩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순간 상대가 꺼낸 칼날에 반사된 태양 빛에 뫼르소는 공포를 느낍니다. 총이 발사되고, 그 이후에도 네 발의 총성이 들립니다. 뫼르소는 그렇게 재판에 넘겨집니다.
소설 속 살인에 대한 재판 과정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프랑스인에 의한 현지인 살인 사건이라면 '우발적 살해'나 '과실 치사' 정도로 결론을 나는 경우가 많았답니다. 하지만 '왜 죽였냐'는 질문에 '햇볕에 눈이 부셔서'라고 대답한다거나 담당 판사에게 '신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뫼르소는 재판에서 참작될 수 있는 긍정적인 부분들에 대해 거짓말하기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그대로 말합니다.
'사회적 시선'인 재판은 '살인'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어머니 장례절차에서 보여준 자세, 장례 다음날 코미디 영화를 보고 여자를 만난 것 등을 예로 들며 뫼르소를 단죄할 사람으로 규정하고 그 행위를 설명할 뿐입니다.
가십성 기사에 목마른 언론은 인성을 문제 삼아 그를 공분의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재판부는 뫼르소를 영혼이 없고, 도덕적이지 못한 폐륜으로 몰아갑니다. 그러므로 의도적 살인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통념에 반대하는 위험한 인물이기 때문에 사형을 해야 한다는 논리였지요. 그에 비해 변호사는 무능력했고, 뫼르소는 스스로 항변할 기회조차 없이 '단두대 사형'이라는 최고형을 받습니다.
형집행을 앞둔 그는 자신은 사회적 관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사회적인 통념에 따라 장례식에서는 울어야 하고, 신을 믿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이지요. 사회체계 안에서 자신은 이해받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행복했고, 사형받는 그날,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합니다. 뫼르소에게는 세상에 대한 어떤 기대나 연민도 없어 보입니다.
작가 알베르 카뮈
주인공의 시점으로 올곳이 한 권을 따라 읽었지만, 책장을 덮을 수가 없습니다. 주인공의 마음을 독자인 나는 충분히 공감할 수는 없지만,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작가인 알베르 카뮈에 대해 찾아봅니다.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으로 노동자이던 아버지는 1차 대전에서 목숨을 잃고, 어머니는 스페인계로 청각 장애가 있는 하인으로 힘든 노동에 전전했다고 합니다. 가난했지만 그의 창작력을 발견한 스승에 의해 계속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29살이던 해, 소설 <이방인>을 발표합니다. 이 밖에도 <페스트>, <시지프의 신화> 등 활발한 작품활동을 했고 44세이던 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3년 후 향년 47세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세상의 부조리'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작가는 끊임없는 인간의 욕망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치는 '선과 악', '양과 음'처럼 분명하지 않고 아무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지요. 삶의 욕망과 아무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은 세상과 충돌지점, 그 부조리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알베르 카뮈의 작품은 그 부조화 속에서 얼마나 인간을 정형화할 수 있는지, 인간의 개성보다는 집단화, 체계화에 갇혀 뒤틀려질 수 있는지를 표현한 작가로 평가됩니다.
'다수의 생각이 옳다고 믿는 것들을 꼭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질문할 때 이미 듣고 싶은 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이 믿는 '상식'이나 '관념'이 진정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도 봅니다. 그 다름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면 세상을 좀 더 다채롭고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현실 간의 타협지점도 그렇게 찾을 수 있다면 어떨까요. 조금 더 행복해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