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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주 Oct 17. 2023

생로병사,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상실의 5단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선택뿐입니다.

우리 시외삼촌은 제가 짝꿍과 연애할 때부터 만나 뵙기를 고대하던 분이었습니다. 지금의 남편이 형제 중 가장 외탁인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었었거든요. 남편이 시아버지보다 시외삼촌님을 더 닮았을까 만나기 전부터 기대가 많았습니다.  

 


유난히 반짝이는 눈빛에 반들반들한 대머리. 영국 유수의 대학을 졸업한 지성인으로 그간 책도 몇 권 내신 분이셨습니다. 성향이 히피스러운 구석이 있으셔서 어디에 구속되는 것을 거부하신 분이셨지요. 여행도 많이 하셨고, 이분은 원불교에 관심이 많으셔서 한국 방문하셨을 때 템플 스테이가 하고 싶은 일 1순위였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목표를 정신세계 탐구 위주로 하신 분이라 일가를 이루지 않고 매력적 싱글남으로 평생 살아오신 분이었습니다. 다행입니다. 웃는 입매 말고는 시외삼촌과 짝꿍이 별로 닮지 않았기에 남편은 저와 혼인하여 한 쌍으로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리 자유로운 삶을 살아오신 시외삼촌. 올해 연세가 여든셋이십니다. 코비드 락다운 직전에 대퇴부 골육종 진단을 받으셨고, 다행히 고령에 고위험군이다 보니 세상이 어지러움에도 불구하고 수술을 잘 마치셨습니다. 문제는 항암 치료 및 회복 기간이었는데, 면역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터라 여동생인 우리 시어머님만 가끔 면회할 수 있을 뿐, 병원에서 유배 생활과 다름없는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래도 완치 판정을 받으셨고, 병을 이겨내셨으니 승자입니다.



몇 해전 시외삼촌님의 80세 생일 파티. 큰 병을 이겨내고 나니 시간의 유한함을 더 크게 느끼셔서였을까요. 평소와는 다르게 아는 분들을 모아 성대한 파티를 엽니다. 생일파티 장소로 지역 주민회관을 빌리셨는데 칠순에서 팔순, 연로하신 어르신들이 그 방에 가득 들어차 계십니다. 코비드 락다운 이후 이런 인파를 오래간만에 만나게 된 한창 젊은 이 조카며느리도 살짝 당황할 정도였습니다. 온통 영국 어르신들 사이에 내가 입장을 하니 몇 분이 호기심을 표하십니다. 시아버지가 어떻게 아셨는지 바로 내 옆에 오셔서는 "내 셋째 며느리야." 하시면서 손님들에게 자랑스럽게 소개를 하십니다. 저는 시아버지 사랑을 많이 받는 행운아입니다. 손님들과 얘기하면서 보니 50년도 넘은 대학 동기분도 계시고, 젊어서 런던 도심 누비며 즐겁게 어울리던 친구들, 지역 교회 친구분들, 북클럽 멤버들. 시외삼촌과의 각기 다른 인연을 말씀하시는데 듣는 재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좋은 사람은 오랫동안 곁에 두시는 어르신의 모르던 성품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주의를 환기합니다. 언제나처럼 밝은 웃음에 인자한 미소를 띠고 시외삼촌이 입장하시고 함께한 모든 축하객들이 생일축하 노래를 부릅니다. "80번째 생일 축하해 트레버. 사랑해" 여기저기서 애정을 담은 축하의 인사말이 들립니다. 오빠와 남편 사이에서 감격의 눈물을 찍어 누르고 계시는 제 시어머니도 보입니다.  
 


올해 초부터 다시 어르신의 몸 이곳저곳이 말썽입니다. 문제는 여동생도 고령이다 보니 이제는 들여다보는 일이 쉽지 않아 졌습니다. 다행히 사시는 곳 주위에 지인분들이 오며 가며 보살펴 주시지만, 아무래도 가족과는 다르겠지요.


 

책 '인생수업'에서 감정의 다섯 단계 대목이 나옵니다.  

살아가며 겪는 상실에서 우리는 "부정-분노-타협-절망-수용"의 단계를 거친다는 내용입니다.


 

시외삼촌님의 자유로운 성품상 지금처럼 자신의 집에서 구속 없이 살고자 무던히 노력하셨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몸이 불편해서 거동이 어려워지지만 긍정의 마인트 컨트롤을 수행하시며 수없이 현실을 부정하셨을 겁니다. 


 

시어머님을 통해 들은 바로는 NHS, 즉 영국의 의료시스템에서 시외삼촌님의 불편한 부분에 대해 바로 수술 날짜를 잡아주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뜨리셨다고 합니다. 현재 영국 무상의료시스템은 과부하 상태로 일촉즉발의 생명의 위협이 아닌 이상, 관련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의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시외삼촌이 이제는 요양 시설을 알아보고 계시다는 소식입니다. 영국 노인 시설은 타운의 형태를 띤 곳이 많습니다. 각 호에 방 하나에 작은 부엌, 화장실 그리고 조그만 거실이 설비되어 있습니다. 그 개인 공간들이 여러 개 모여 하나의 건물블록을 이루고 있는 시스템이지요. 개인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한 고육책인데, 건물 안에 간호사 레벨의 의료 인력이 상주하고 있고 나름의 방문 케어 프로그램이 운영됩니다.



지금도 그분의 내면에서는 '부정-분노-타협-절망-수용 단계'를 이리저리 넘나들고 계실 것입니다.  부디 가족들과 너무 멀지 않은 곳에 작지만 안전한 새 보금자리를 찾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절망의 단계는 뛰어넘으시고 수용의 단계로 잘 넘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생로병사,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인생의 단계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더 쓰입니다.


 

안녕하지 않은데 안녕하냐고 묻고 괜찮다고 대답하는 인사치레보다는, 시어머님의 고급 정보들을 바탕으로 여기도 마음 쓰는 사람들이 있음을 표현하고 응원할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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