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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주 Sep 03. 2024

잉글랜드 국기가 왜 이탈리아 제노아에?

깃발의 역사를 배운다

얼마 전 프랑스 파리 올림픽 개막식은 선수단이 요트를 타고 등장하는 색다른 이벤트였다. TV 화면에 대한민국 대표단이 등장하자 나는 스크린에 대고 사진을 찍는다. 대한민국 국호를 잘 못 부르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지만 파리 세느강을 타고 등장하는 태극기는 그 자체로 이색적이고 특별한 순간이었다.


각국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국기를 들고 입장할 때면 나는 아이들과 게임하듯이 "저 국기는 어느 나라?" 하면서 즐기고는 한다. "어 미국", "저기는 캐나다", "우와 대한민국 태극기".


그런데 이 놀이가 유럽 국기들로 넘어가면 굉장히 어려운 게임이 된다. 딸아이 말을 빌리자면 짝대기 색이랑 방향만 바꾼 나라들이 수두룩이다.  

영국TV에서 태극기를 보니 무척 반갑다 @BBC

나는 영국에서 살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영국을 구성하는 4개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 아일랜드) 중 잉글랜드에 살고 있다. 국기는 하얀 바탕에 붉은 십자가를 그려놓은 성 조지 십자기(St. George Cross)다. 올림픽은 영국팀(Team GB)으로 출전했지만, 축구경기나 크리킷 같은 경기는 잉글랜드 국기에 사자 세 마리 엠블럼을 가슴에 달고 목청 높여 응원하는 국가다.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이탈리아 북부를 여행하고 있다. 이미 20도 미만의 가을 온도인 영국과는 달리 이곳은 지금도 낮 기온 30도를 넘는다. 하지만 한국의 여름과는 달리 습도가 낮아 그늘로 들어서면 바람이 불어 견딜만하다.


첫 번째 목적지는 13-15세기 강력한 해양권력을 쥐었던 항구도시 이탈리아 북부 도시 제노아(Genoa)다. 바질 페스토와 포카치아 빵이 유명하다. 해변도시답게 낙지나 앤쵸비 등 해산물도 신선하고 맛있다. 여행지에 가면 그렇듯 지역 특산물과 새로운 문화 안에 푹 빠져 한창 들떠 다닌다.   


해외여행을 가면 나에게 익숙한 것들과는 조금 거리를 두고 싶어 진다. 어디를 가나 만날 수 있는 맥도널드나 스타벅스 커피숍을 보면 짐작할만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지만, 기껏 신나게 다른 문화를 찾아 즐기다가 훅 들어오는 익숙함에 김 빠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맛있게 저녁 식사를 즐기고 주변을 걷기 시작한다.  바다 갈매기 시원하게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기저기 잉글랜드 국기 인 성 조지 십자가가 보인다. 처음에는 영국 기업들이 많이 진출해 있는 줄 알았다. (모르면 용감하게 단정해서 상상이 가능하다) 분명 이탈리아인데 잉글랜드 집 근처 같다며 아이들과 웃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저기 너무 많다. 알고 보니 이 깃발이 제노아 지역을 상징하는 '성 게오르기우스 십자기'였다.
 

이탈리아 제노아에서 나붓기는 성 게오르기우스 십자기 @세반하별

어, 그럼 누가 이 깃발을 먼저 사용하기 시작한 거지?
 

지노아(Genoa)는 10세기부터 시작된 항구로, 12-15세기 막강한 해양 군사력을 바탕으로 지중해 가장 중요한 교역항이 되었다. 현재도  EU 중 12번째 규모의 교역항을 운영하고 있다. 규모가 컸던만큼  배가 항구에 들어설 때면 약탈이나 위협으로 선박 안전에 위협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런던 통치자가 안전확보를 위해 제노아 공화국의 군주에게 깃발을 빌릴 수 있는가 청했고, 그 요청이 받아들여져 영국 배들은 제노아 군주에게 국기 빌리는 값을 치르면서 깃발을 꽂고 항해를 했다. 1771년까지 사용료를 지불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잉글랜드 역사가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성 조지 깃발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훨씬 이전인 1183년 십자군 원정 때부터라고 주장한다.  종교 전쟁이라 불리는 십자군 전쟁에서 기독교인들의 항거를 상징하는 깃발로써, 위험한 상황에 저항하는 '가장 영웅적이거나 가장 눈에 띄는 용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성 조지기는  <용맹함의 상징>이다.  


이즈음해서 대한민국 국기인 태극기를 생각해 본다. 국기 중앙의 원 안에 붉음(양)-푸름(음)이 조화를 뜻하고 사방의 건(하늘)-곤(불)-감(물)-래(땅)를 두어 세상 기운과의 조화를 일컫는다. 국기에 세상 만물과의 조화를 담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용맹하게 세상을 호령하는 기운을 뜻하는 깃발과 세상의 기운을 조화롭게 아우르는 깃발.


국기만 봐도 각 국가들이 상징하는 가치가 다르구나 이번 기회에 또 한 번 배운다. 더불어 국기마저도 좋은 것은 바로 가져다 쓰는 영국 역사를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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