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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주 Sep 18. 2024

영국에서 맞는 한가위 추석

기후 변화로 절기에도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

영국은 지난주부터 아침기온 9도 정도로, 걸칠 겉옷 하나쯤은 찾게 되는 선선한 가을 날씨다. 오늘은 한가위 추석날이다. 한국 가족들이 모여 있을 시간에 맞춰 화상 전화를 건다. 내가 있는 이곳은 오전 10시지만 시차 8시간을 더하면 한국은 오후 6시. 다들 저녁상에 모여 앉아 있다.

 

서로 안부를 묻고, 이 좋아하는 음식을 못 먹어 어쩌냐고 놀려댈 때면, 바로 그 밥상 한 귀퉁이에 달려가 앉고 싶다. 가족 3대가 돌아가며 한참을 그렇게 웃으며 통화한다. 휴가가 여름 아니면 겨울이나 되어야 시간이 충분하다는 이유로 추석명절을 함께하지 못한 지 12년. 이제는 그 자리에 나와 우리 가족이 함께 하지 못함에 모두가 익숙하지만, 그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세월이 갈수록 어른들은 주름이 하나씩 늘어가고 아이들은 콩나물 자라듯 매년 쑥쑥 커 간다.  


작년 봄 청와대 근처, 세반하별

통화를 마치고 나니 ‘명절 증후군’이 온다. 한국 며느리들이 명절마다 고된 가사노동 후에 앓는다는 증세지만, 나에게는 한국 명절 분위기가 무척 그리워지는 그런 증세다. 이대로 있을 수 없다. 송편을 빚어야 맞지만, 쌀 불리고 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얼른 부엌에 가서 쇠고기 다짐육이랑 일전에 아시안마트에서 사다 얼려 놓은 만두피를 꺼낸다.


유난히 맑고 높은 가을 하늘인 오늘, 부엌 따뜻이 볕 드는 자리에 서서 만두를 빚기 시작한다. 다짐육에 집 마당에서 뽑아온 파 한 개, 마늘 두 쪽. 두부가 있으면 좋으련만 없어도 그만이다. 소금 한 꼬집, 후추 톡톡. 계란 한 알 탁 깨서는 손으로 치댄다. 꾹꾹 치대면서 맛있어져라 주문을 외운다.


집에서 만들려면 아무래도 손이 많이 가니 특별한 날에만 하는 손만두는 이런 명절날 제격이다. 만두피 하나씩 들고 꼼꼼히 만두를 빚는다. 만두 예쁘게 빚어야 예쁜 딸 낳는다던 예전 할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학교에서 열심히 뛰놀고 있을 두 딸의 얼굴도 떠오른다. 나도 모르게 흥얼흥얼 콧노래가 나온다.

찜기에 면포를 깔고 만두를 찌기 시작한다. 첫 찜기 만두는 서로 붙어서 온전히 면포에서 떼어내기 쉽지 않다. 두 번째 찜기는 두 사이 간격을 좀 더 넓게 두고 찌기 시작한다. 제법 익숙한 모습의 만두가 나온다.


남은 만두소로 고기전, 집에 있던 애호박 썰어 호박전도 부친다. 남편, 아이들 한 사람씩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 이 무슨 고소한 냄새야고 묻는다. 한 상에 모아 차려보니 제법 특별한 날 같다.


영국에는 종교적인 의미로 9월 말 경, 한 해의 수확을 감사하는 미사를 봉한다. 하지만 추석과 같은 명절은 없다. 영국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한국의 추석에 대해 엄마인 나는 그 의미를 설명해 보지만, 학교 다녀와 배고픈 아이들은 듣는 둥 마는 둥 빚어 논 만두 먹느라 바쁘다.

영국의 가을, 세반하별


올여름 한국은 역대급 더위를 경험했다고 한다. 화상 통화로 만난 한국 가족들은 추석인 오늘도 낮 기온 30도로 덥다며, 다들 반팔 티셔츠 차림이다. SNS에는 추석 장바구니 물가에 대한 인증 사진들이 올라온다. 시금치 한 단, 쪽파 한 단의 가격표가 보이는데, 눈이 의심스러울 만큼 비싸다. 올해 여름이 유난히 뜨거웠기에 한랭기후에 적합한 배추, 시금치 같은 엽채들이 그 뜨거움에 다 녹은 데다가 명절 특수시기까지 겹쳐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른 탓이다.


그에 반해 영국은 작년 겨울부터 비가 평소보다 더 많고 일조량이 적었다. 매체에 따르면 지난겨울 잦은 비로 인해 지반이 약해진 데다가 감자싹이 다 썩어, 올봄 모종 수급이 어려웠다고 한다. 이후 여름에도 비는 계속되고 일조량이 부족하니 농산물 수확량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올 영국 국내 감자 수확량은 예년에 비해 17% 감소했다고 한다.


굳이 언론 뉴스를 보지 않아도, 내 생활 속에서 기후 변화에 따른 생태계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집에 키우는 사과나무만 봐도 꽃이 열매를 맺는 과정이 다른 해보다 유난히 느렸다. 이쯤이면 넘치게 많이 수확한 사과들을 공짜로 가져가라고 집 앞에 내어놓는 이웃들이 있는데, 올해는 아직까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질 기미가 다.

어제 산책에서 만난 가을 빛, 세반하별

농경 사회에서 일하느라 고된 여름을 보내고 수확을 마친 이 시기,  봄 농사 파종 전 여유로운 한 때를 즐기던 문화는 기후 변화로 그 시기나 풍습이 바뀌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마음대로 환경에 생채기를 내어온 인류에 자연환경이 화가 난 것 같다. 오늘 아침 영국 국영방송 BBC는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 중부 유럽은 물난리고, 이베리아반도 끝 포르투갈은 산불로 고전하고 있는 영상을 교차로 보여준다.


오늘 밤 휘영청 밝은 둥근 보름달을 보면서 풍요로운 수확을 가능하게 한 지구와 하늘에 감사,  그 못지 않게 아픈 지구가 어서 평소대로 기운차리기를 기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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