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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주 Sep 12. 2024

영국에서 팔리는 면 요리에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정성을 다해 소박하지만 따뜻하게 만드는 국수 한 그릇의 힘

무덥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오전 내내 계속된 회의에 지치고 짜증이 올라오던 그때, 마침 반가운 점심시간이 됐다.  그 순간 오직 한 음식 생각뿐이다. 바로 매운 해물짬뽕이다.


뜨끈한 국물, 코 끝에서 느껴지는 묵직하고 진한 냄새. 이 한 그릇을 땀 흘리며 맛있게 먹고 나면,  다시 오후 시간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힘을 얻고는 했었다.


영국에서 살고 있는 나는, 가끔 그런 뜨끈했던 국물이 그리울 때가 있다. 영국 사람들은 음식을 따뜻하게 대접하지만 뜨겁게는 내어놓지 않는다.  

하루는 한 식당 메뉴판에서 일본식 라멘을 발견한다. 뼈를 한참 우려낸 육수에 두툼한 고기(차슈)를 얹어주는 전통의 그 깊은 맛 일리는 없지만,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주문해 본다.


한참을 기다려 받아 든 음식은 끓인 인스턴트 라면 위에 닭가슴살 몇 쪽과 고수 그리고 저민 고추가 흩뿌리듯 올려져 있다. 내가 가장 실망한 부분은 라멘의 온도였는데, 뜨끈하기는커녕 미지근하다. 그 와중에 희한하게 불지 않은 면발이 더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다른 어느 날에는 제법 규모가 큰 아시안 음식 프랜차이즈점에서 '한국식 우동'을 발견한다.  일식, 태국식과 함께 있던 한국식 우동이라면 김치가 들어있지 않을까 막연히 상상하며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드디어 주문한 '한국식 우동'이 나왔다. 예상했던 김치는 없고 대신 완두콩과 갖은 야채들 그리고 고수잎이 올려져 있다. 진한 간장소스가 제공되는데 탁자 앞에 고추장 소스가 있다. 좀 넣으면 한국 국수맛이 날까 싶어 숟가락에 짜서 먹어본다. 내가 평소에 아는 그 고추장 맛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달콤 새콤하게 만드는 비빔국수 소스에 실수로 설탕을 넘치게 넣었을 법한 그런 달고 단 소스다.

매장 직원은 누가 봐도 동아시아 사람인 나에게 이 음식 맛있지 않냐며 묻고 또 묻는다. 문제점을 도와주지 못할 거면서 솔직한 필요는 없다. 맛있다고 같이 웃음 지으며 가게를 나선다.  


고급 음식점에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느 날 특별한 일로 런던 고급 한식점에 갔을 때 먹어본 음식들은 현지에 직접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전통 음식 맛이었다. 접시마다 또 얼마나 정성을 다해 곱게 담아내어 놓던지 식사 시간 내내 눈과 입이 즐겁다. 그중에서도 뜨끈하게 받아본 설렁탕과 그에 담긴 국수는 정말 일품이었다. 물론 이런 음식을 자주 즐기기는 어렵다. 식사 후 받아 든 청구서 가격이 무시무시했다.



왜 일반 영국 식당가에서 만나는 아시아 면 요리는 이렇게 밖에 소개되지 못할까? 아시아 음식에는 왜 다들 고수를 얹어 내는지 모르겠다. 메뉴 개발자들이 맛 연구할 때 각 지역별 차이를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았거나 일반 영국민들이 동남아식 음식 맛을 선호해서 일수도 있다.


이즈음 되니 영국에서 만나는 일반 면류 음식들은 아시아 음식의 '모방'인가 '영감'인가 아니면 '현지화'인가 고민스럽다.


모방 : 다른 것을 본뜨거나 본받음.

영감 :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기발한 착상이나 자극.

현지화 : 일을 실제 진행하거나 작업하는 곳의 특성에 맞춤.  


궁금해서 사전적 의미까지 찾아가며 생각해 보지만, 요즘 내 경험으로 봐서는 그냥 이름만 빌린 유행 따른 '수지 맞춤'이라고 해야 할까 싶다.


엄마가 손으로 만들어 주시던 칼국수. 반죽을 떠 만들어주시던 수제비. 전통 중국집에서 수타로 뽑아낸 면으로 만든 감칠맛 나던 짜장면, 해물 짬뽕. 뿐만 아니라 재래시장에 갈 때면 멸치 국물에 다진 양념 한 스푼 딱 올려 먹는 잔치국수를 먹고 나서야 그날 시장을 떠날 수 있었다. 임신으로 배가 남산만 했던 어느 무덥던 여름날들은 콩을 직접 갈아 만든 콩국수와 냉면으로 버텨냈었다. 교토 장인이 직접 뽑아냈다던 냉메밀은 살얼음 동동 띄운 장국과 함께 하면 또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던 이 모든 면 요리들은 누군가의 손으로 만든 정성이 듬뿍 담겨 있었다. 파스타면을 직접 뽑는 이탈리아 음식점은 있지만, 유럽 식당가에 손맛을 더한 아시아 국수는 쉽게 찾을 수 없다. 비싼 인건비 그리고 음식에 담기는 정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분명히 음식을 먹고 나왔건만, 이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은 허전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오늘 저녁에는 스스로 정성을 다해, 소박하지만 온기를 담아 국수 한 그릇을 만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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