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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주 Dec 09. 2023

빨강이 제법 잘 어울려요

크리스마스 시즌으로 여기저기 따뜻하고 붉은 기운이 감돈다. 시내는 몇 주째 쇼핑객들로 붐비고 길거리는 밝은 조명들이 반짝인다. 아무 생각 없이 매일 마시는 티백 사러 나갔다가 나도 그 쇼핑객들에 휩쓸려 다니고 있다. 방계 가족이 스무 명이니 나도 뭘 준비해야 할 텐데, 심드렁하니 쇼핑이 귀찮다. 이렇게 기운이 떨어질 때에는 주로 달콤한 간식거리를 하나 입에 넣거나 밝은 색감의 물건을 찾기 시작한다. 달콤하면서 붉은 크리스마스의 색이 가득한 그 무엇. 나는 아이들에게 줄 어드벤트(Advent)  초콜릿 캘린더를 하나씩 사주기로 한다. (* 어드벤트 캘린더 – 12월 1일부터 24일까지 매일 하나씩 열어보는 달력 형태의 예수 강림절 상품)


 

어려서 엄마는 나에게 “너는 빨강이 참 잘 어울리는구나” 하셨다.

내 어렸을 적 사진들을 보면 빨간색이거나 적어도 빨간색이 섞인 옷을 자주 입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엄마는 옷을 고르는 과정을 참 즐거워하셨는데 남대문 보세 시장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옷무덤 속에서 기막히게 딱 맞는 물건을 찾아내고는 하셨다. 어떨 때는 몇몇 엄마들과 함께 모여 아동복 공장에 가서 도매가격으로 한 무더기 옷을 사 오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매일 때때옷을 입을 수 있었고, 제법 잘 어울렸나 보다. 사람들이 이쁘다고 한 마디씩 하면 나는 정말 내가 이쁜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예쁘다고 한마디 하시던 분들이 다 아동복 도매공장 원정팀이셨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들끼리 모여서 “정말 싸게 샀다.”, “어쩜 그리 물건을 잘 고르니” 서로 칭찬의 릴레이를 나누시던 기억이 난다.  그 멤버 중 한 분이 1년 동안 남편 영국 연수를 따라 떠나셨다. 엄마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구매 대행을 부탁하셨었나 보다. 귀국한 그 가족들은 나에게 선물을 주셨다. 붉은빛 전통 스코틀랜드 치마 한 장과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였던 여가수 카일리 미노그의 “로코모션” 카세트테이프. 처음에 나는 친구가 생각해서 사온, 물 건너온 귀한 선물인 줄 알았다. 노래 테이프는 마르고 닳도록 들었고, 그 붉은빛의 스코틀랜드 치마는 특별한 날, 크리스마스 성탄절에 차려입는 옷이 되었다.


 

나는 유난히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어려서는 빨간 김치를 물에 씻어 먹고는 했었다. 그 모습을 보신 친할머니가 큰 며느리인 엄마에게 아이를 저렇게 먹게 키웠다고 타박하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나의 친할머니는 항상 한복 차림에 포마자 기름으로 머리를 곱게 빗어 쪽지고 앉아 계시던 대쪽 같은 분이셨다. 그저 무서운 친할머니가 나 때문에 엄마를 나무라시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이후로는 친할머니랑 같이 하는 식사 시간이 불편했고 평소와 다르게 소식쟁이가 되고는 했었다. 밥상에서 말간 빛깔의 음식들만 몇 점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로 친구들이 일본에서 태어나야 했을 애가 잘 못 태어난 것 아니냐 놀릴 정도로 싱겁고 심심한 음식을 선호했고, 빨갛고 매운 음식은 멀리 했다.


 

대학 입학 후 첫 동아리 회식 자리에 참여했다. 그날의 메뉴는 감자탕. 탁자 위에서 끓고 있는 붉은 기운의 국물과 낯선 소주병이 청초한 초록색을 띄며 놓여있다. 머뭇거리던 나는 분위기에 휩쓸려 선배가 떠 준 접시의 국물을 한 입 먹어보는데, 세상 이런 진미가 없다. 감자뼈를 두 손으로 들고 이렇게 뜯어먹어 보라며 고춧가루 낀 이빨을 보이며 씩 웃던 어느 선배의 얼굴을 기억한다. 어찌나 쪽쪽 뼛속 즙까지 빨아먹던지, 엄마가 보셨으면 기절하셨을 모습이지만 따라 해본다. 그와 단짝처럼 어울리는 소주의 알코올향이 스며드는데 처음 느끼는 알딸딸함과 함께 미지의 세계를 여는 청신호탄 같은 맛이었다. 그러고 나서 보니 우리 엄마는 그 당시 채식주의자였다. 고기반찬이 없으면 식사 못하시던 아빠 덕분에 매일 고기구이나 불고기 요리를 자주 하셨지만, 감자탕 같은 음식은 엄마의 메뉴판에는 없었다. 한 번은 친구 따라 매운 닭발집에 가봤다. 거의 통증 수준의 매운맛이었는데 그 매운 열기를 꺼보겠다고 계란찜에 쿨피스를 들이붓고 있었다. 혀가 얼얼하니 아픈데 그 덕에 친구랑 놀리면서 웃고 매운맛에 진땀이 나는데 묘한 상쾌함을 느꼈다. 다음날 아침 화장실 테러 수준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본래 매운맛을 감당하지 못했던 나는 세상 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친구들과 속마음 터놓고 수다 떨고 싶을 때 매운맛을 찾기 시작했다. 세상은 여전히 매운 갈비찜, 매운 떡볶이, 매운 낙지볶음, 매운 불닭 라면 등 그 빨갛고 뜨거운 맛에 열광하고 있다.  


 

예전에는 흰색 백합과 같은 미색의 꽃대가 큰 꽃들을 좋아했었는데, 완연한 중년기에 들어선 요즘 불그스름한 빛의 꽃들이 좋다. 들꽃같이 자그마하면서도 붉은빛이 도는 꽃들이 그리 예뻐 보일 수가 없다. 크고 유려하지 않아도,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들풀이지만 땅에 뿌리내리고 꽃 피우기 위한 노고를 알만큼 나 스스로 철이 들어서 일까 싶다. 가을 낙엽을 보면 노란 은행잎보다는 빨간 단풍잎이 좋다. 노랑 은행잎만큼 흔하지 않기도 하고, 그 빨간 단풍잎에 여러 가지 색들이 섞여 있을 때가 많아서 더 좋다. 붉은빛으로 보이지만 노란색, 녹색, 갈색... 빛에 노출됐던 방향 따라 붉지만 다른 빛으로 낙엽이 되어 바스락 거린다.


 

사람에게 선호하는 색상이 있게 마련이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 선호 색상이라는 것이 때에 따라 변해왔던 것 같다. 더운 날에는 하얗거나 푸른 옷을 입어 청량감을 높였고, 겨울이면 따뜻한 색 계열의 카디건을 걸쳐 화사하게 입듯이 말이다. 태극전사들의 붉은 경기복을 바라보며 전의를 불태우고, 크리스마스에는 붉은 성탄 점퍼를 입는다. 우리는 그렇게 자신의 상황에 맞춰 필요한 기운의 색으로 인생을 채워간다.    


 

엄마가 귀한 딸을 보며 어울리는 색으로 붉은색을 생각한 것은 단순히 낯빛과 잘 어울려서였을까. 당차게 세상을 살아갈 따뜻한 기운을 얹어주고 싶어서였을까. 묻고 싶은데 대답해 줄 님이 곁에 계시지 않아 아쉽다. 다만, 나는 지금도 빨강이 제법 잘 어울린다고 내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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