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영국에서 내 집 마련

새로운 공간과의 인연

by 세반하별

지난 6개월 간 시간이 날 때마다 남편과 함께 살 집을 찾아다녔다. 영국은 역대 최대 이민자들이 올 한 해 입국했다며 연일 매체마다 대서특필 중이었고, 내가 사는 이곳도 도시 규모에 비해 유입 인구가 많아 항상 주택난에 시달리는 곳이다. 우리의 예산 규모 안에서 최선의 집을 찾아보고자 발품을 팔아보지만, 역시나 원하는 조건에 맞는 매물이 많지 않아 집 구하기가 녹록지 않다. 그러다가 드디어 한 집이 눈에 들어온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다. 주인장이 정성으로 관리해 온 것이 느껴지고 무엇보다 우리 가족이 이 공간에서 함께 웃는 모습이 상상된다.


우리는 10여년 전 첫 내 집 마련을 이뤘었다. 그 당시에는 막 가족을 형성하는 시기로, 첫 아이를 낳자마자 어딘가 정착할 필요를 느꼈다. 둘째 계획도 있고 해서 서둘러 서울에 작은 둥지를 마련했다. 첫 내 집이다 보니 포인트 전등도 달아보고 방마다 벽지 색깔도 다르게, 하고 싶은 대로 신이 나서 일을 벌였던 기억이다. 나중에 돌아보니 그저 비싼 경험이었을 뿐 수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 집에서 둘째 아이가 태어났고 어린 두 아이가 앉고, 걷고, 서고, 말하는 환상적인 순간들을 바로 그 공간에서 경험했다. 이후 해외 생활이 시작되면서 우리에게 집이란 발령이 나면 이동하기 쉽고, 생활이 편한 임대집 들이었다. 더불어 소유하는 부동산은 오로지 수익을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었다.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고 이제는 한 곳에 정착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몇 해전부터 가족과 함께 살 집을 사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코비드 이후 사람들은 앞다투어 집 구매를 이어갔고 덕분에 급등한 집 가격을 보니 굳이 이 상황을 추격하기보다는 좀 기다려보자 하고 있었다. 올해 세계적으로 금리 인상이 일어나며 부동산 시장에 급매 물건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하자 적극적으로 집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것이 올 상반기였고, 시간이 지나 벌써 연말이 되었다.


영국은 집이 마음에 들면 매수자가 집주인에게 구입 의사를 밝힌다. 매도자가 그 의사를 받아들이고 나면 그때부터 자신이 이사 나갈 집을 찾는 시간을 갖는데, 우리나라와 같은 보증금 제도가 없기 때문에 매수자든 매도자든 금전적 손해 없이 중간에 없던 일이 될 수 있다. 이번 경우에도 우리는 3개월 전에 구매 의사를 넣었고 집주인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그 이후로 잠잠한 상황. 차일피일 미루기만 할 일이 아니라 아이들 방학이고 하니 집 구경도 시켜줄 겸 마지막 일정들을 확정하기 위해 다시 매입할 집에 방문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첫 번째 집 뷰잉과는 달리 이번에는 집주인이 부동산 중개인과 함께 직접 우리를 맞이한다. 십 년 간 이 집에 거주했다는 여인은 집에 애정이 많아 보였다. 이곳저곳 둘러보면서 자신의 이야기도 해주고, 이웃들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면에서 이 집을 좋아하는지 설명해 주는데, 누군가 아끼던 물건을 물려받는 기분이다. 마당에 있는 사과나무, 자두나무 직접 심던 이야기도 해주고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곳은 마당 한가운데서 하는 일광욕이라며 웃음 짓는다. 다행히 두 딸들도 그 집에 흡족해하고 주인장도 자신이 이사 나갈 집을 찾았다며 6주 안에 모든 과정을 끝내고 이사하도록 정리하자 서로 동의하게 되었다. 넉넉잡아 두 달 후면 이사를 간다.


집은 항상 투자 개념으로 찾다가 이번에는 살고 싶은 곳으로 찾았다. 물론 훗날 수익을 봤을 때는 다른 집들이 더 좋은 기회였을 수도 있지만, 이 집의 공간과 기운이 앞으로 우리 가족들과 잘 맞춰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집을 보고 돌아오는 길, 딸들은 자기 방에 무슨 색 페인트를 칠할 것인가 조잘 대고 남편과 나는 다시 한번 우리의 결정에 흡족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돌아와 놀다가 어쩐 일인지 김칫국물을 거실 카펫 위에 흘렸다. 임대집이니만큼 각별히 더 신경 쓰기도 했고 2년 넘게 살면서 뭐 하나 흘린 적 없었는데, 오늘 그 빨간 김칫 국물을 흘렸다. 카펫 클리너에 베이킹 소다, 식초까지 동원해 보지만 그 붉은 자국은 흐릿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남았다. 남편이 말하기를, “이것은 이제 이사하라는 신호야” 하며 웃는다. 새로운 우리 집에는 카펫 없는 마룻바닥을 깔 참이다. 영국은 온돌 시스템이 없기에 포근한 분위기를 위해 카펫을 까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청소할 때마다 먼지가 많고 이번처럼 색이 강한 것을 흘리면 복구가 쉽지 않다. 김칫국물 자국을 바라보며 이제는 내 취향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구나 더욱 실감이 난다.


만물은 그 끌림이 있다. 사람과 사람뿐만 아니라 물건과도 마찬가지다. 유난히 자주 손이 가는 물건이 있고, 잃어버렸다 가도 자석의 끌림처럼 다시 돌아오는 물건이 있는가 하면, 그저 손가락 사이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그냥 내 곁을 떠나는 물건들도 있다.


지난 몇 달간 손수 집 개보수 공사하는 기술을 배우는 수업에 참여했었다. 이제는 단순히 들어가 관리하기 쉽게 사는 공간이 아니라 내 손으로 직접 꾸며가는 재미를 경험하고 싶다. 아파트 생활을 사랑하던 내가 그동안 영국 사람들의 정원 가꾸기, 집 고치기 좋아하는 분위기에 많이 동화되었나 보다.

keyword
이전 03화안전지대를 벗어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