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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주 Jan 11. 2024

홍차(茶)

스리랑카 농장 그리고 영국 홍차

부슬부슬 비 내리는 아침, 새벽의 공기는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고 내가 움직이는 소리에 짝꿍이 혹여 깨어날까 조심조심 까치발로 방을 나선다. 침대 밖은 역시 춥다. 얼른 주방으로 내려가 전기 포트에 물을 올린다.  


아침마다 잉글리시 블랙퍼스트라 불리는 인도 아삼차를 마신다. 영국의 국민차로 티백 하나를 내가 좋아하는 머그컵에 담는다. 또르륵 뜨거운 물을 부어 티백을 적시면 갈색 실타래처럼 찻물이 배어 나오기 시작한다. 컵 속 그 찻빛이 충분히 진해지면 하얀 우유를 살짝 첨 한다. 호로록 마시면 따뜻하고 향긋한 찻물이 온몸에 퍼지면서 몽롱하던 정신을 깨워 준다.


영국 사람들은 물 대신 차를 마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이 둘 이상 모이면 제일 먼저 차 한잔을 대접하고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김없이 우리고 난 차 티백이 산처럼 쌓이고는 한다. 차의 고장 영국 답게 커피보다는 차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고, 실제로 애프터눈 티처럼 중간중간 끊임없이 홍차를 마신다. 자연환경적인 요인도 차를 사랑하는 문화에 분명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커피보다는 카페인의 함량이 낮고 어둡고 추운 날씨에 몸을 따뜻이 데워주기에는 차만큼 좋은 친구가 없다.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Tea Advent Calendar가 히트 상품으로 팔린다.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이브까지 하루에 하나씩 설레는 기다림과 함께 여러 가지 다른 향의 차맛을 즐기는 재미가 쏠쏠하다.  


영국의 차 역사는 1823년 영국 브루스 소령이 중국에서만 자라는 줄 알았던 야생 차나무를 인도 아삼 밀림에서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차 문화는 영국 식민지 전역에 퍼졌고 충분한 공급을 위해 다르질링과 아삼을 지나 저 아래 스리랑카까지 차 재배 지역을 넓혔다. 인도는 현재 세계 1위의 홍차 생산국이고 온 국민이 아침저녁으로 홍차와 차이를 마신다. 일교차가 많이 나는 고원지역의 찻잎 향이 좋다. 식민지 시절 인도에서 나는 고급품은 거의 수출하고, 남은 마르고 거친 향의 찻잎을 지역 주민들이 홍차에 우유, 설탕 그리고 마살라라는 향료를 넣어 차이(Chai)를 끓여 마시게 되었다고 한다. 방문한 스리랑카에서도 쉽게 차이(Chai)를 마셔볼 수 있었는데, 그 향이 다소 강하고 진한 데다 설탕이나 연유 등을 넣었는지 무척 달다. 하루에 한잔이면 온종일 에너지가 넘칠 것 같은 맛이다.  

 

스리랑카의 홍차 농장 견학을 갔다. 우리 가족과 다른 일행들이 모여 여행사 미니 버스를 타고 한 시간여 산길을 따라 고원지대로 이동한다. 아이들이 지루해할 즈음 야자수 가득한 정글 사이에 황토색의 농장 건물이 보인다. 이곳은 조상 대대로 운영되어 온 농장으로 역사가 길고, 여러 종류의 홍차와 커피콩을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우선 농장 전경이 보인다. 농장 건물 안에 들어서자 직접 생산되는 홍차들을 시음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다. 우선 그 종류가 무척 다양해서 깜짝 놀란다. 커피를 더 사랑하던 나는 홍차에 대해서는 잉글리시 블랙퍼스트 그리고 다즐링 정도의 맛을 안다. 영국 사람답게 짝꿍은 여러 차 맛을 음미해 가며 한 마디씩 감상을 얻는다. 우리 집 꼬마 아가씨들은 나가서 농장을 뛰어다니고 싶어 벌써부터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있는데 말이다.  


가이드분이 눈치채시고는 우리 일행과 함께 농장 구경을 제안하신다. 두 대의 지프차에 나눠 타고 농장 견학을 하는데 워낙 부지가 넓고 나무들이 많아 가이드 설명이 없이는 그 나무가 그 나무 같다. 아이들은 커피콩이 빨갛고 예쁘다며 왜 엄마 커피는 그리 까맣냐고 묻는다.  


자연스럽게 다음은 농장 안 차 로스팅 구역에 들어선다. 모녀지간으로 보이는 두 여인이 로스팅한 찻잎들을 찬 바닥에 널어 말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대대로 이 농장에서 일하는 분들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 덧붙여진다. 깡마른 두 여인은 조용히 대화를 나누며 일을 하고 있다. 어르신이 계속 젊은 아가씨에게 뭐라 이야기를 하는데 짐작건대 일을 가르치고 있는 듯했다. 일터에 방문객이라니 불편할 법도 하건만 열심히 주위 구경하는 아이들에게 로스팅 전과 후, 찻잎을 만져도 보고 냄새도 맡게 도와준다. 엄마인 나는 그 작업구역을 떠나면서 조용히 목례로 두 분께 인사를 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내 고마운 마음이 그녀들에게 전해졌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공장 건물 모퉁이를 돌아 다실로 안내된다. 반대편 산 아래가 내려다 보이는 풍경 좋은 코너였는데 원하는 홍차에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씩이 마련되어 있다. 출출하던 참에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 따뜻한 차 한잔이 무척 반가웠다.


이 다실은 전형적인 영국 식민지 시대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있는 건물 1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영국 남자인 남편에게 스리랑카 노여인이 공손하게 주전자를 들어 차 한잔을 대접한다. 그 모습이 문득 식민 시대의 모습을 재연하는 듯하다. 로스팅한 찻잎을 널어 말리는 일을 하던 여인들, 찻잔에 갓 우려낸  홍차를 서빙하던 노파. 이들이 평생 수작업으로 딴 좋은 찻잎을 영국으로 보내는 일을 대대손손 하고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물론 대자연 속에서 열심히 일하고 생활하는 삶이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 노동만큼의 이윤을 가져가는 것 같지는 않다. 허름한 옷매무새와 표정에서 무한 육체노동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몇 가지의 농장 상품들을 구매한 후 다시 미니 버스에 올라 굽이굽이 구릉지를 내려온다. 지역 주민들은 거의 쓰러져가는 농가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방인이 가득한 버스에 수줍지만 밝은 미소를 짓는 사람들이 많다. 문득 도시 속에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에게는 없는 그 해맑은 미소가 여기에는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차 농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보면서 되려 어설프게 그들의 삶을 재단하여 상상한 것은 아니었던가 되돌아 생각해 보게 된다. 삶의 행복은 어떤 공식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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