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돌아보기, 퇴사 소감문 09
내가 13년이 넘는 시간을 보낸 직장은 공공기관이다. 공공기관을 다닌다는 것은 장단점이 있다. 어떤 기관에 다니느냐에 따라, 또 개인 성향에 따라 느끼는 장단점은 다르다. 안정성을 최대 장점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는, 워라밸 때문에 공공기관을 선택한 사람도 있고 공공의 이익을 실현하는 가치 있는 일의 성격 때문에 다니는 사람도 있다.
공공기관도 기본적으로는 회사이고 직장이다. 민간기업을 다니는 것이나 공무원으로 사는 삶과 크게 다르진 않다. 그래도 그 중간 어디쯤의 공공기관만의 특성이 조금 있다. 언뜻 보면 양쪽의 장점만을 취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근에는 공공기관에 대한 선호가 높다. 안정성은 공무원에 버금가고 급여는 대기업 수준인 신의 직장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일부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공공기관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있다.
1. 공공기관 직원은 공무원이다?
아니다. 공공기관 직원의 신분은 일단 민간인이다. 민간인과 대비되는 단어는 공무원인데 바꿔 말하면 공공기관 직원은 공무원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공무원 취급을 받기는 한다. 정부(공무원)가 해야 하는 업무를 위탁 또는 위임받아 수행하는 경우나, 공공기관의 고유사무 자체가 법에 명시된 공적인 것일 경우는 공무원에 준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공공기관 직원에게는 공무원에 준하는 윤리성이 요구되고 청탁 금지법, 이해충돌 방지법 등의 법령과 내부 규정에 적용을 받는다. 공무원까지는 아니지만 민간인과는 다른 통제를 받는다는 뜻이다.
공무원이 아니기 때문에 법적으로 신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또 공무원연금이 아니라 국민연금 가입 대상이며 근로자 이기도 하다.(공무원은 근로자로 취급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2. 공공기관 직원은 갑질이 심하다?
최근에는 아니다. 공공기관은 민간기업과 계약 관계를 맺고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다. 공공기관이 갑, 민간기업이 을의 입장에서 말이다. 갑의 위치이긴 하지만 갑질은(?) 할 수가 없다. 오히려 공공기관이기 때문에 함부로 하지 못한다. 특정 공공기관의 갑질이 언론 등에 보도되어 문제가 되는 경우 해당 기관은 많은 것을 감당해야 한다. 감사원 감사나 권익위 조사는 물론이고 국정감사에서 지적을 받을 수도 있다. 더욱이 공공기관 평가에서 감점이 따라온다. 갑의 입장이지만 함부로 하지 못한다.
공공기관의 이러한 점을 악용하는 민간 기업들도 있다. 일단 계약을 하면 무언가 말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공공기관은 기본적으로 정부(공무원)의 지시와 감독을 받는 곳인지라 위아래 양쪽으로 동네 북(?)으로 전락한 거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3. 공공기관은 업무가 많지 않다?
그렇지 않다. 누군가 나에게 공공기관 직원은 아침에 출근해서 커피 마시고 잡담이나 주고받다가 점심 이후에 1~2시간만 일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매일 챙길 일이 그리도 많은데 말이다. 물론 기관마다 부서마다 업무량은 모두 다르다. 확실한 건 최소한 내가 만났던 여러 공공기관의 직원 중 그렇게 한가하게 노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어느 조직이나 있는 월급 루팡이나 관심 사병 같은 존재들을 제외하자.) 특히 내가 공공기관을 다닌 지난 13년은 업무가 계속해서 늘었다. 정부의 사업 가짓수가 늘고, 예산이 늘면 당연히 공공기관의 일도 많아진다. 국회에서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법은 기본적으로 정부와 공공기관이 해야 하는 일을 규정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공무원과 공공기관의 일은 줄어들 수 없는 구조다.
민간기업과는 일의 성격 다르긴 하다. 대부분의 민간 기업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데 반해 공공기관은 통상 돈을 쓰기 위해 일을 한다.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를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돈을 잘 쓸 것인가를 궁리해야 한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돈을 원칙과 규정에 맞게 쓰는 일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4. 공공기관은 워라밸이 좋다?
꼭 그런 건 아니다. 위의 업무량과 관련된 오해와 비슷하다. 내 경험으론 최근들이 워라밸이 좋아지고 있다. 나의 경우에도 10년 전과 최근 1~2년을 비교해보면 업무 시간은 확실히 줄었다. 업무량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공공기관의 일은 오히려 늘었다. 다만 워라밸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전체적으로 일을 하는 방식에 변화가 온 결과라 할 수 있다. 특히 최근의 신입 직원들이 그런 경향이 강하다. 이런 것들을 고려하면 워라밸은 비교적 좋은 편이다.
하지만 일과 삶의 균형이 아직 잡히지 않은 경우도 많다. 특히 공공기관 본사의 핵심 부서는 여전히 야근이 많다. 경영 평가나 예결산, 국정감사 등 시즌이 다가오면 밤샘도 각오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는 부서나 지사에서 근무하는 경우는 워라밸이 비교적 좋은(?) 편이다.
5. 공공기관은 월급이 많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공무원보다 수준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특정 공공기관의 경우 월등한 급여 수준으로 언론의 이슈가 되었덕 것도 사실이다. 특히 금융이나 과학기술계 공공기관들이 높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금 살펴봐야 할 것이 있다. 과기계의 출연연구소 직원들은 보통 박사급 연구원들이다. 하는 일은 대학의 교수들과 유사하다. 서울의 유명 대학 교수 연봉이 1억이라고 할 때와 대전의 출연연구소 책임연구원의 연봉이 1억이라고 하면 반응이 다른데 그럴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어떤 공공기관은 연봉 수준 자체도 높지 않다. 특정 분야의 공공기관의 경우 신입 초임이 3천만원을 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민간의 대기업이나 IT분야 기업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공공기관이 기본적으로 좋은 직장인 것은 분명하다. 고용 안정성이나 급여 수준 모두 평균 이상이기 때문이다. 나도 직장 생활을 계속할 생각이었다면 퇴사를 선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공공기관도 직장이기에 여느 직장과 마찬가지의 비애와 어려움도 있다.
특히 정치권이나 언론과 연관된 어떤 일이 생기면 바짝 엎드리고 안테나를 세워 사방을 살펴야 한다.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부담스럽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이 무거울 때도 많다. 그럴 때면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표지 사진 출처 AL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