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슈슈의 모든 것>을 처음 본 게 중학생쯤이었던 것 같다. 당시 어둡고도 현실적인 영화의 분위기에 빠졌을 뿐, 스토리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니, 당시 이해라도 제대로 했을까 싶다.
그리고 꽤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애프터 양>이라는 영화의 음악을 통해 그때의 기억이 다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1. 릴리 슈슈의 모든 것, All about Lily chou chou, 2001
먼저,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중학생 유이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청춘의 어둡고도 섬세한 이야기를 그린다. 유이치는 학교에서 옛 친구였던 호시노를 중심으로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끊임없는 폭력과 배신을 경험한다. 유이치는 현실에서 벗어나 가상의 가수 '릴리 슈슈'의 음악과 릴리 슈슈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위안을 삼지만,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며 지배하는 호시노 옆에서 유이치도 그에 가담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린다. 결국 유이치가 이상적 세계로 생각했던 릴리 슈슈의 음악조차도 현실의 비극과 혼돈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면서 깊은 절망감과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영화는 청소년기의 고통, 절망, 그리고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강렬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해 끝없는 우울을 안겨주는 작품이었다.
2. 애프터 양, After Yang, 2021
<애프터 양>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SF 드라마로, 안드로이드 '양'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한 가정의 이야기를 그린다. 양은 딸 미카의 형제이자 친구로서 가족의 정서적 연결을 책임지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양이 작동을 멈추면서 가족은 충격과 상실감을 느낀다. 가족들은 양의 메모리를 통해 그의 숨겨진 기억과 감정, 인간적 존재의 의미를 탐색한다. 이 과정에서 가족은 양의 감정적 깊이를 발견하고, 자신의 삶과 상실을 다시 돌아보며 진정한 의미의 가족 관계를 회복한다. 양의 기억과 연결되면서 가족들은 잃어버렸던 정서적 유대감을 다시금 느끼게 되며 치유와 회복의 따뜻한 감정을 경험한다.
3. 다른 영화, 같은 음악 하지만 다른 음악으로 다가오는 이유
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외로움, 상실, 그리고 기억이라는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두 작품에서 음악이 감정의 매개체로 사용되는 방식과 느낌은 명확히 다르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음악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처 역할을 하면서도 결국 현실의 고통과 혼란을 더욱 강조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반면 <애프터 양>에서는 음악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단절된 감정을 이어주는 따뜻한 연결고리로 기능하며, 회복과 소통을 위한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매개체로 작용한다.
이러한 차이는 Salyu의 곡 'Glide'를 통해 더욱 두드러진다. 같은 곡이지만 두 영화 속에서 이 음악은 전혀 다른 정서적 뉘앙스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한쪽에서는 외로움과 비극을 더 깊이 새기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상처받은 감정들을 다시 연결하고 회복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4. 내가 다르게 듣는 것이 과연 음악뿐일까?
어쩌면 같은 음악이지만, 누가 어떤 마음으로 듣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두 영화는 증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두 영화 모두 영화가 끝나는 시점에 흘러나오지만, 다가오는 느낌이 전혀 다르니 말이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의 ‘Glide’는 마치 끝내 도달하지 못한 구원처럼 들린다. 현실에서 도피하려던 유이치에게 릴리의 음악은 마지막까지도 현실을 바꾸지 못한 채, 공허하게 흘러나온다. 맑고 아름다운 멜로디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속에 담긴 절망과 무력감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음악은 그저 흐를 뿐, 끝내 비극의 여운으로 남는다.
반면 <애프터 양>에서의 ‘Glide’는 사뭇 다른 정서로 다가온다. 미카가 조용히 노래를 부르고, 제이크는 곁에서 그 목소리를 묵묵히 듣는다. 죽음을 둘러싼 슬픔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품으려는 태도 속엔 조용한 따뜻함이 있다. 그 노래는 상실을 말하는 동시에, 남겨진 이들이 여전히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위로를 건넨다.
같은 곡, 같은 멜로디. 그러나 전혀 다른 시간, 전혀 다른 마음으로 마주했을 때, 그 음악은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되어버린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내가 다르게 듣는 것은 어쩌면 음악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같은 장면도, 같은 말도, 같은 하루도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얼마나 다른가에 따라, 모든 것이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이 두 영화는 조용히 알려주고 있었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