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10 스얼레터#144
꽤 오랜 세월동안 물을 무서워했어요. 9살 무렵 수영장에 심하게 빠진 후로 트라우마가 생겼거든요. 그때를 기억해보면, 어린아이의 몸은 물 앞에 무척 나약했습니다. 깊다고 느낀 순간 몸은 빨려 들어갔고 숨은 계속 차오르는데 손은 수면에 닿지 않았어요. 제 시야를 가득 메운 건 일렁이는 빛뿐. 무서울 정도로 평온한 그 수면을 본 후로 물에 몸을 담근다는 건 두려움의 대상이었죠.
그런 제가 2주 전 서핑을 배우러 발리로 떠났습니다. 누가 봐도 큰 결심이었어요. 수영도 잘 못하는데 할 수 있을까. 파도에 휩쓸려 빠지면 어떻게 하지. 그런데 매번 함께 여행을 떠나는 베프의 의지가 매우 강했습니다. "파도 위에 서는 거잖아. 어떤 기분일지 너무 궁금하지 않아?” 제게 도전과제를 던진 거죠. 그래 까짓꺼. 한 번도 안 해보고 죽기엔 아쉬울 것 같으니까.
그렇게 인도네시아 섬에 도착했습니다. 발리는 상상 이상으로 멋진 곳이었어요.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미풍으로 날씨는 말할 것도 없고, 단추가 없는 가벼운 옷차림. 맛있는 음식, 영어가 편한 환경, 여유로운 사람들. 싼 물가. 그곳을 사랑할 이유를 꼽으라면 몇 시간이고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발리가 더욱 특별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서핑의 경험이 컸어요.
첫날의 긴장감은 대단했습니다. 애써 몸을 보드 위에 누였고 머리 속에는 그냥 배운 대로 하자라는 생각만 가득했죠. "UP!"이라는 인스트럭터의 구호가 떨어졌고 두 발을 차례로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한 순간이었어요. 보드 위에 '정말' 섰던거죠. 누구도 이 자세가 정답인지 말해주지 않았지만 확신이 들었습니다. 순간 육체의 무게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고 아래에 있는 파도의 움직임이 보드를 넘어 그대로 전해졌거든요. 제 자신이 순풍을 타고 항해하는 돛단배가 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
바로 그때였던 것 같아요. 물에 대한 두려움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쾌감과 편안함이 온몸을 가득 채웠던 때가. 그야말로 자유로워진 거죠.
그다음 날은 바다에 나가는 시간만 기다렸어요. 마침 석양이 지는 시간이라 온 하늘과 바다는 붉은빛으로 가득 찼고 서핑을 하기에 환상적인 날이었습니다. 자유로워진 저는 파도를 타기 위해 쉴 새 없이 바다로 들어갔고 장난스럽게 치는 파도들로 신이 나 계속 웃음이 났어요. 또 한 번 보드에 올라타려는데 강사분이 기특하다는 듯 웃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난 걱정이 생길 땐 서핑보드를 챙겨 바다로 와. 서핑할 땐 신경 쓸 게 몇 가지 없거든. 파도와 바람만 느끼면 돼. 그리고 그냥 혼자 일어서는 거야. 심플하지?"
분명 서핑이 그의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알겠더라고요. 한참을 파도와 바람, 두 가지만 신경 쓰고 나면 세상이 끝날 것처럼 좌절스러웠던 현실도 생각보다 심플해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그런 경험 있잖아요. 왜 이렇게 나만 불행할까 하며 펑펑 울다가도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를 듣고 허탈해서 웃음이 터질 때.
그렇게 힘들 때마다 찾을 존재가 항상 그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니. 얼마나 든든할까.
갑자기 그의 한 마디가 들렸습니다.
"너도 걱정이 생기면 언제든 여기로 와."라고.
- 이제 물이 무섭지 않아! 데이나 드림
스얼레터 144호 다시 읽기 : https://mailchi.mp/startupall/140-2039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