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흔적을 남기고 있고,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될까?
아빠가 천국에 간지 벌써 거의 두 달이 다되어간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가만히 일을 하려 자리에 앉아있다가 생각이 나면 하염없이 슬퍼진다.
혹자는 이를 평생 간직해야 할 슬픔이라고도 한다.
이런 슬픔을 평생 동안이나 간직해야 한다는 게 버겁기도 하다.
아빠가 하늘나라에 가니, 나 또한 '죽음'이란 단어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할까?라는 근원적인 고민부터 말이다.
그러던 중, 최근 간혹 듣던 홍대 뉴송교회 담임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정말 인생의 고민을 하게 만든 설교를 듣게 되었다.
(아래는 그 설교의 내용)
흔적 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스티그마라고 사용합니다.
2006년 33세밖에 안 된 젊은 군의관이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됩니다.
영락교회 청년부 출신이었고, 교회에서 장례식을 했습니다.
조문객이 무려 4천 명이 왔다고 합니다.
젊은이가 죽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찾아올까? 찾아온 사람들끼리도 서로 몰랐는데,
근데 장례식 때부터 사람들이 이유를 알기 시작했어요.
나는 이 청년 의사가 근무하던 병원 앞에 구둣방 하던 할아버지입니다.
이 청년은 자기가 구두 깨끗한데도 맨날 구두 가지고 와서 구두값보다도 늘 돈 더 얹어주면서 네 손을 만지면서 할아버지 아유 춥지 않으세요?
할아버지 외로우시죠? 하나님 믿으세요 하나님이 할아버지 너무 사랑하시거든요.
그러면서 예수님을 소개해 주고 기도해 줬던 청년이었답니다.
또 한 아주머니가 와서 영정사진 앞에 오열을 합니다.
나는 이 의사가 근무하던 병원의 세탁담당하던 사람입니다.
이 청년 의사는 나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아주머니 힘드시죠? 천천히 하셔도 돼요.
아픈덴 없으세요? 제가 약 받아들일까요? 어디? 아프다고 하면 의사가 직접 약국에 가서 약까지 받아와 가지고 기도해 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고 바보 같은 의사 병원에서 당시 2000년대 초기에 의약분업 때문에 파업이 막 일어났어요.
의사들이 파업하니까 그때 굉장히 심각한 상태가 벌어졌죠.
근데 그가 환자의 곁을 떠날 수 없다고 진료를 하겠다 하니 너만 의사야 아유 너만 잘났어.
완전히 따돌림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자신이 오해를 받든 안 받은 환자들의 곁을 지키던 바보 같은 의사였어요.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불렀다.
그의 이메일의 마지막 문장 설정은
예수님의 스티그마 안수현
그러면서, 아빠는 나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던 사람일까?라는 것을 반복해서 생각해 보면,
아빠는 그냥 '따뜻한 아빠'라는 것으로 표현이 되는 것 같았다.
마지막 봉안함에서의 그 온기마저 아빠가 준 선물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나는 어떤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즉, 내가 걷고, 이야기하고, 내뱉고, 행하는 것들이 결국에 무엇을 드러내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이었다.
내가 죽으면 사람들이 나를
화려하고 명예롭고, 돈이 많고, 위대한 그런 사람?으로 기억하면 좋을까?
물론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나는,
세상에 예수님의 사랑과 따뜻함을 흘려보내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그 흔적을 남기며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결국 내가 하고 있는 스타트업이란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회사는 당연히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고, 성장도 해야 하고 잘되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중심이 내가 잘되고, 내가 돈 많이 버는 것이 우선시 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제품은 고객들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 제품 이어야 할까?
우리의 제품은 고객의 마음속에 어떤 따뜻함을 전달할 수 있을까?
이 고민들을 근원적으로 하다 보면, 결국 나머지 것들은 따라오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결국 사용자의 마음속에 흔적을 남기는 제품이 되어야 하는구나 싶었다.
아무튼, 흔적이라는 단어를 요즘 많이 묵상하게 된다.
내가 혹시 언제 어떤 순간으로 하늘나라로 갈지는 모르지만, 그저 따뜻함을 세상 곳곳에 흔적으로 남기고 간 사람이라고 기억되면 하늘나라에서도 굉장히 기쁠 것 같다.
그나저나, 아빠가 그리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