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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Dec 07. 2020

1200만원 부수기①

어느 책을 사볼까요, 알아맞혀 보세요.

사서의 가장 전통적 역할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수서다. 수서란 쉽게 말해 도서관에 꽂아둘 책을 고르고 구매하는 과정을 말한다. 개인적으로 나와 가장 맞지 않는 업무였던 기억이 난다.


먼저 학교도서관의 도서 구입비는 학교 기본 운영비의 3% 이상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하지만 지켜지는 곳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일했던 학교만 해도 기준에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었다. 그랬는데도 1년 치 도서 구입비만 1200만원이었다. 이 정도면 규정을 지켜주지 않아서 고마운 수준이었다.(진심이 아니라 인력 부족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다)


도서 가격은 제각각이지만 평균 수준인 12,000원으로만 잡아도 천 권을 골라야 한다. 숫자만 봐도 이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잠시 복본(=동일한 책)을 잔뜩 샀던 전임 사서의 마음을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성의껏 수서를 해나갔다.




수서 과정대략 이렇다.

1. 희망도서 신청 양식을 교사와 학생들에게 뿌리고 돌려받는다.

2. 도서관에 있는 책인지 확인하고 신청했을 리가 없으므로 내가 직접 복본 조사를 한다.(정말 인기도서라 복본이 필요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부 뺀다)

3. 그 외 규정에 안 맞는 도서를 걸러낸다.(만화, 문제집, 전집, 고가의 도서, 오래된 도서 등)

4. 신뢰성 있는 기관의 추천 도서 목록을 다운로드하여 복본 조사를 끝낸 후 참고한다.

5. 평소 아이들이 언급했던 도서나 인기가 많아 늘 자리에 없는 도서, 너덜너덜해서 이제는 보내줘야 할 도서도 추가한다.

6. 학교에서 상영할 만한 DVD 자료도 살펴본다.(연령대 확인 필수)

7. 드디어 구매 예정 목록이 완성되었다. 학교 게시판에 공지하고 도서관 운영위원회 회의 일정을 잡는다.

8. 도서관 운영위원회 회의를 통해 목록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다.

9. 피드백을 반영한 구매 예정 목록을 행정실에 전달하고 도서 구매를 요청한다.

10. 행정실에서 업체를 선정하여 견적서를 받고 함께 확인하고 주문을 넣는다.(절판 도서인 경우 이 과정에서 빠진다)

11. 도서 업체와 연락하며 요청사항을 전달한다.(스티커 색상이나 자세한 분류 조건 등) 이때 적극적인 업체에서는 참고용 책을 하나 가지러 오기도 한다.

12. 업체에서 책이 도착하면 목록대로 잘 왔는지 검수를 한다.

13. 새로 들어온 책을 서가에 꽂는다.




참으로 번잡스럽고 귀찮고 긴 과정이 아닐 수 없다. 분명 대략이라는 말로 시작했으나 이보다 더 줄일 수는 없었다. 사실 수서를 시작하기 전에 신간도서 자리를 비우는 과정도 필요하다. 그건 정말이지 그냥 중노동이다.


이렇게 과정이 많으니 당연하게도 잡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수서라는 하나의 업무에만 엮이는 사람이 열 명이 넘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한 번에 들여오기에는 쉽지 않은 규모이니 절반으로 나누어 학기별로 한 번씩 한다. 그래서 이번 편 제목이 '1200만원 부수기'인 것이다.


특히 업무 적응이 완벽하지 않았던 1학기 수서 때 정말 많이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일단 도서관 운영은 기본이고, 행사 준비와 진행도 하면서, 구매할 책을 골라내다 보면, 정말이지 몸이 3개였으면 싶다. 거기다가 분명히 온작품읽기 도서는 구매하지 않는다고, 지금 있는 도서로 진행하라고 했음에도 누군가는 고집을 피웠다. 물론 들어주지 않았지 그런 류의 감정 소모가 너무 심했다.


8번에 있던 도서관 운영위원회는 또 어떻고? 선정된 일부 교사와 함께 하는 회의인데, 사실상 형식적인 절차이다. 적어도 내가 있던 학교에서는 그 목록을 나만큼 자세히 들여다보는 교사도 없었고, 그러니 성의 있는 피드백이 나올 리가 없었다.


"목록 보니까 교사용 책이 너무 없는 것 같아요."

"아, 예전 목록을 보니까 비중에 너무 적어서 제가 이번에 조금 늘린 거예요."


회의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고 갔었다. 표정 관리를 하느라 고생했었고, 개인적으로 시간 낭비라고 본다. 이 회의가 계속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임 사서는 자기 편할 대로 책을 샀던 거니까.


하지만 이 와중에 진짜 대박은 도서 업체였다. 책을 가져다 놓더니 검수도 안 하고 가버린 것이다. 수서 업무 처음이었던 나는 원래 그런 줄 알았지만, 후에 다른 학교 사서 선생님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렇지 않았다. 원래 업체 사람과 사서가 함께 검수를 한다는 것이다.


검수는 목록과 책을 대조해서 확인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중으로 확인하기 위해 보통은 그렇게 하는 것 같다. 게다가 이 일은 두 명이서 함께 할 때와 혼자 할 때, 시간 차이가 굉장히 많이 난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나도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이 부분은 나중에 밝히도록 하겠다. 약간 스포를 하자면, 내가 학교에 있는 동안 유일하게 인류애를 느꼈던 에피소드였다.




아무튼 정말 지겹고 힘든 수서였지만, 그래도 보람을 느끼는 순간도 있었다. 바로 내가 심혈을 기울여 고른 책들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을 볼 때였다. 최대한 고심해서 애들이 좋아할 만하면서도 교육적인 책으로 꽉꽉 채운 신간 서가는 언제나 북적거렸고,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고생은 어느 정도 미화가 됐다. 그런 것마저 없었다면 정말이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수서를 진행하던 때가 도서관 업무에 관한 능력이 점점 상승하면서 익숙해지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런 때에 예기치 못한 위기는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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