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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연 Oct 12. 2023

3. 방울 토마토 살해 사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지친 기분이 들었다. 밥 차리기를 포기하고 아침으로 토마토 주스를 먹기로 했다. 잘 익은 방울토마토를 깨끗이 씻어서 믹서기에 담았다. 방울토마토 열두 알, 각얼음 일곱 알, 설탕 두 스푼을 넣고 맹렬히 돌아가는 믹서기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뚜껑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뺀 찰나 토마토 주스가 공중으로 분사됐다. 잔인하게 살해당한 방울토마토의 살점들이 부엌 가득 흩뿌려졌다. 정수리에 얹힌 토마토 주스의 진득함과 눈 앞에 펼쳐진 빨간 풍경이 어이가 없어서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이 밀실에서 범인은 누가 봐도 피를 뒤집어쓴 나였다.     


'또 정신을 놨구나, 내가.'


순간 마룻바닥이 아래로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금세 또 우울해졌다. 

    

'저대로 두면 진득한 주스가 그대로 말라 붙어서 나중에 치우기 더 힘들 텐데.... 근데..... 뭐 어때. 모르겠다...'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열심히 부엌을 닦았다. 핏자국 같은 방울 토마토의 잔해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구석구석 치웠다. 머리도 다시 감았다. 정리를 마치고 나니 아침이고 뭐고 모든 게 다 귀찮아졌다. 빈속에 우울증 약을 먹고는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너무 심심했다. 0번부터 999번까지 채널을 계속 돌렸다. 그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해도 드라마나 영화가 재밌어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넷플릭스에 들어갔다. 짧은 프리퀄 영상을 보고 넘기고 보고 넘기고. 모든 카테고리의 콘텐츠를 한 번씩 다 보고서야 리모컨을 손에서 놨다. 이제는 배가 고팠다. 대충 밥을 차려 먹었다. 무엇을 먹든지 상관이 없었다. 그냥 배가 고프다는 기분을 없애고 싶었다. 어떤 생각이 드는 것조차 귀찮았다. 정말 인간이 아닌 기계라도 된 기분이었다.


우울증의 증상은 대부분 비슷하지만,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고 한다. 나에게 우울증은 삶의 모든 것에 무감각해지는 병이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간절하지 않다. 못 먹으면 못 먹는 대로 괜찮고 잠을 못 자면 못 자는구나 싶다. 우울하다는 건 슬픈 게 아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함에 가깝다.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로 오래 지내다 보면, 점점 감정 자체에 무뎌지게 되고 욕구 자체를 인지하기가 어려워진다. 무언가 하고 싶다는 감정이 사라지고 무기력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처럼 그저 이 세상을 부유하는 한 덩이의 찌꺼기가 된다. 생각도 행동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는 것, 이게 내가 앓고 있는 병의 실체다. 설상가상으로 불안증이라는 혹도 하나 더 붙어 있다. 잠시 후 일어날 일부터 아주 먼 미래까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부터 일어날지도 모르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걱정했다. 그렇게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이어 불안이라는 괴물을 물고 왔다.     

 

MBTI 검사를 하면 열 번 중 열 번이 INTJ로 나왔다. 인티제는 차분하고 냉정한 성격이라고 하는데, 이 말에 그다지 이견은 없다. 평소에도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은 아니었고 별다른 일이 없다면 365일 대부분을 감정적 고요함 속에서 사는 편이었다. 하지만 우울증은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곳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해에 아주 느린 속도록 끝없이 침잠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무엇을 해도 감흥이 없었고 신이 나지 않았다. 감정 그 자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따뜻한 로봇이라는 인티제의 별명처럼, 말 그대로 속이 텅 빈 36.5도짜리 고철 로봇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 어떤 행위에서도 기쁨과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밥을 먹어도 맛있지 않았고 성수처럼 여기던 커피도 그저 습관처럼 마실뿐이었다. 즐겨보던 드라마와 예능도 전부 재미가 없었다. 영상을 5분 이상 보는 것이 지겨웠다. 노래를 들으면 더 우울해졌다. 모든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슬픈 가사는 슬픈대로 기분이 가라앉았고, 행복한 가사는 행복함을 느낄 수 없는 스스로를 비관하게 되기에 들을 수가 없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설치한 휴대폰 게임만 수십 개였지만 30분도 하지 못하고 삭제하기 일수였다. 

무엇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이 길어지면 어느 순간 공허함은 공포가 되었다.      


'이대로 영원히 아무것도 못하면 어떡하지. 평생 이렇게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걸까? 그럼 왜 살아야 할까? 그냥 이대로 사라지면 안 되나. 누가 나를 이 세상에서 지워줬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까지 다다랐을 때 다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대로 있으면 밖으로 뛰쳐나가 달리는 자동차 앞에 몸이라도 던질 것 같아서 무작정 샤워를 했다. 그렇게 죽고 싶은 기분을 벅벅 긁어 내고 나오면 조금은 개운한 기분이 드는 것도 같았다. 이번에도 죽지 않고 잘 참았다는 안도감에 조금씩 올라오는 눈물을 삼키고 아무 게임이나 들어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우울증은 감정뿐만 아니라 몸에도 영향을 준다. 쌓인 스트레스는 신체 반응으로 나타나고 소화불량이나 두통에 시달린다. 너무 많이 자거나 제대로 자지 못해 컨디션은 떨어지고, 항상 긴장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체력도 빠르게 소모된다. 지능도 떨어진다. 뇌기능이 떨어져 집중력과 기억력이 나빠진다. 이전보다 못한 나를 넘어서 평범한 사람들보다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울증에 걸린 몸과 뇌는 그 기능이 평균 이하로 떨어지고 챗바퀴 돌 듯 제자리만 빙빙 돈다.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고 원망하면서 스스로를 계속 갉아 먹게 된다. 

정상이 아닌 이 상태를 평생 가지고 갈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원래대로 돌아가야 했고 다시 평균이 되기 위해서 발버둥 쳐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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