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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연 Mar 03. 2024

엄마와 달리기(1)

1997년 대한민국은 IMF 외환위기로 나라가 온통 어지러웠다. 한보그룹을 시작으로 대우, 기아 등 기업들의 부도가 줄을 지었다. 금융권이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은행들은 점차 문을 닫기 시작했고 달러 환율은 폭등했다. 실업자는 백오십만 명을 넘어가고 너나 할 것 없이 빨간색 압류딱지가 붙여지던 시절,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엄마는 동네에서 제일 큰 종합학원을 운영하셨는데 내가 두 살이 되었을 때 학원을 정리하셨다. 그렇게 수년간 애정을 쏟았던 일을 정리하고 실업자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아장아장 걷기만 하던 내가 웃으며 뛰어가 안기자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셨다. 내 인생의 첫 달리기였다.      


 빚을 지게 된 엄마는 외할머니에게 돈을 빌려 급한 빚부터 갚으셨다. 그리고 우리 남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웅진 코웨이에서 정수기 판매 일을 시작하셨다. 그 시절 우리는 먹고 싶은 걸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고 가지고 싶은 걸 선뜻 가질 수 없었다. 그렇지만 엄마는 우리 남매가 하고 싶다는 건 다 하게 해주셨다.

어느 날 오빠는 태권도를 다니고 싶어 했다. 방과 후 친한 친구들이 다 도장에 가는 바람에 자신만 겉돌게 된 것이 이유였다. 우리는 당장 다음 날부터 태권도장을 다니게 되었다. 하얀색 도복을 맞춰 입고 흰색 띠를 야무지게 맨 후에 배에 힘을 주고 다섯 살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기합을 넣었다. 그 뒤로 매일 태권도장에 갔다. 도복을 갈아입고 본격적인 운동을 하기 전에 도장을 열 바퀴 뛰었다. 내 인생의 두 번째 달리기였다. 운동에 재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여덟 살 터울의 오빠는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서 도장을 그만두었다. 나는 오빠가 오지 않는 태권도장을 혼자서 세 달을 더 다녔다.      

엄마는 또래 아이들과 달리 집에서 책만 읽는 오빠를 답답해하셨다. 태권도를 그만둔 다음 해에 우리는 동네에서 가장 큰 수영장에 갔다. 유아반부터 고등부까지 있는 꿈나무 수영단에 등록했다. 오빠가 학교를 마치는 시간에 맞춰 일주일에 3일은 수영장에 갔다. 노란색 부표를 잡고 물 위에 떠서 발차기하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얼마간 발치기를 배우고 나니 혼자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부표를 놓은 채 입안에 공기를 가득 넣어 볼을 부풀리고선 열심히 수중 발차기를 했다.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뻗으면 곧장 레일을 따라 나아갔다. 조그마한 발로 달리기를 하듯 첨벙거리는 물을 힘차게 밀어냈다. 그렇게 6살엔 물속에서 달리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우리 가족은 넷에서 셋이 되었다. 마침내 불행한 결혼 생활을 끝내기로 한 엄마는 이혼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아빠를 두고 도망치듯 집을 나와 외조부님의 집으로 향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오빠는 이 상황을 예견했다는 듯이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앞으로 아빠가 곁에 없을 거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아챘을 뿐이다.   



옥이는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육상부에 들어갔다. 체육 시간에 달리기 시험을 보는데 이제까지 운동을 한 번도 배워 본 적 없던 옥이는 그 날 반에서 1등을 했다. 재능의 싹을 알아본 체육 선생님께서는 옥이는 운동을 시켜야 한다며 담임선생님을 여러 번 설득했다. 선생님들의 끈질긴 권유에 결국 육상부에 들어간 옥이는 지구력이 좋아 단거리보다는 장거리 위주로 연습을 했다. 3년을 죽어라 달린 후에는 스스로 달리기에 큰 재능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을 그만둬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에 선배 중 한 명이 운동으로 대학을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운동 특기생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고 서울로 갔다는 선배의 이야기는 그날부터 옥이의 꿈이 되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고문 선생님의 추천으로 검도를 시작했다.

키가 작아 화구가 몸을 짓눌르는 듯 했다. 작은 손으로 죽도를 움켜잡고 기합을 외치며 한 발씩 한 발씩 그렇게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운동을 하면서도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매일 운동을 하며 소진된 체력에도 수업시간에는 눈을 부릅뜨고 선생님의 말을 받아 적었다. 그렇게 50명 중 10등 성적을 유지하며 검도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고등학교 3학년에 되었을 때는 우승 트로피 4개가 모여있었다. 졸업을 앞두고 고문 선생님께서 옥이를 불렀다.


“옥아, 드디어 연락이 왔다. 너 됐다. 서울 갈 준비 해라.”

“정말요? 정말 됐어요?”


3년을 죽어라 훈련하고 검도에 매진한 결과, 서울체대에서 옥이에게 체육특기생 입학을 제안해왔다. 4년간 전액 장학금을 준다는 조건까지 내밀었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이 현실이 되었다. 옥이는 그동안 참아왔던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꿈을 이룰 기회가 왔다. 그렇게 생각한 옥이는 얼른 이 사실을 부모님께 알렸다.


"엄마, 나 전액 장학금으로 대학 갈 수 있어요. 서울로 갈래요."


옥이의 이야기를 들은 춘자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여자가 혼자 타지에 가서 산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옥이를 말렸다. 그렇게 옥이의 꿈은 실현되지 못한 채 인생의 가장 큰 좌절을 맛보았다.        



옥이는 어느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혼자서 두 아이를 책임지게 된 옥이는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낮에는 작은 종합학원에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쳤다. 아이들이 잠이든 밤부터 새벽까지는 대리운전을 뛰었다. 새벽에 들어와 겨우 쪽잠을 자고서 아침 6시가 되면 한식조리사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에 갔다. 남편도 없이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몸이 두 개라도 부족했다. 매일 주어진 24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일에 매진했다. 꿈을 잃었지만 이제는 두 아이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힘을 내야했다.


우리 남매를 대학에 보낼 때까지는 쉬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옥이’는 사라지고 ‘엄마’만 남게 되었다. 그렇게 엄마의 달리기가 시작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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