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존되어 있는 옛날의 기억, 썸웨어 somewhere
TRAVEL ㅣFEBRUARY 2020
스테이폴리오 '트래블'은 작가와 함께 폭넓은 스테이 경험을 소개하는 콘텐츠입니다.
글ㆍ사진 ㅣ 변진혁
흔히 서촌이라 부르는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모여있는 길을 지나, 수성동 계곡 즈음 복잡한 좁은 골목을 타고 주택가로 들어간다. 커다란 문을 밀고 들어오는 순간, 전혀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한 집을 만나게 된다.
경복궁역에서 조금 시간을 들여 걸어 올라오면 만날 수 있는 썸웨어(somewhere). 멋진 영어 이름과는 상반되는 모습이 재미있다. 목조주택과 벽돌집이 붙어있는 특이한 구조다. 처음부터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 거다. 나중에 벽돌집을 붙여서 공간을 확장하지 않았을까 싶다.
집 안의 은은한 조명이 비치는 welcome이라는 글자가 친절한 호텔의 로비처럼 느껴진다. 물론, 인간미 있는 웃음과 말솜씨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살짝 열려있는 문틈 사이로 음악이 새어 나오고 있다.
세월의 흔적을 감추지 않은 오래된 나무 문은 삐거덕거리고, 손때가 많이 묻었다. 바깥쪽보다 안쪽의 손잡이가 더 반들반들한 게 재미있다. 누군지 모를 썸웨어의 옛 주인은 먼저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하는 친절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큰 공간이다 보니, 실내화, 실외화가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현관을 지나 실내화만 신었음에도, 벌써부터 흥미롭다. 썸웨어는 마치 수십 장의 레이어가 쌓여 있는 것 같은 공간이다. 길고 좁은 복도, 수많은 문과 그만큼의 분리되고 다시 이어지는 공간들이 있다. 겨울에는 실내화를 꼭 신도록 하자. 오래된 집이다 보니, 넓은 공동 공간은 난방이 생각보다 빨리 돌지 않는다.
레트로하다는 것은 오래된 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썸웨어는 레트로가 아니다. 그저 오래되었을 뿐이다. 정말로 오래되어서 만들어진 멋이 곳곳에 숨어있다. 삐거덕거리는 바닥도, 화려한 무늬의 천장 조명도, 아귀가 맞지 않아 신경 쓰이는 문도, 오래됨을 감추지 않는다.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대로 살려내었고, 꽤나 멋있게 느껴진다.
현관에서 좌측, 긴 나무 복도를 따라 이동한다. 발걸음마다 삐거덕거리고, 끽끽거리는 소음과 움직임이 좋다. 오래된 나무 바닥을 다 드러내고 튼튼한 새 나무를 깔아 둘 수도 있고, 요즘 기술로 훨씬 매끈하고 고급스럽게 마감을 다시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썸웨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1층 목조주택의 공간 대부분은 다이닝룸으로 풀어내었다. 커다란 8인용 테이블이 다이닝룸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한쪽 벽에는 소파도 있다. 모던한 느낌의 주방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다이닝룸 한쪽 벽은 넉넉한 사이즈의 패브릭 소파가 있다. 오디오는 1층 다이닝 룸에만 있다. 편안히 듣기 좋은 재즈가 재생 중이었다. 블루투스 기능도 있지만, 굳이 선곡을 바꾸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주방은 썸웨어에서 가장 모던한 공간이다. 커다란 바 테이블이 좋아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다이닝룸에 북적거리더라도 주방만큼은 아주 쾌적하게 돌아갈 것 같다.
식기나 주방 기구는 아주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다. 커피를 내려마실 수 있는 드립 세트도 있고, 클래식한 양주 아이스버킷, 잔 등도 인상적이다.
서랍마다 예쁜 그릇이 가득했다. 구색 맞추기로 개수나 채워 놓는 수준의 식기가 아니어서 좋았다. 안주 하나를 담아도 그릇이 예쁘면 기분이 좋으니까.
좀 더 따뜻하고 밝은 날씨에는 창과 문을 모두 열어두고, 다이닝 룸과 중정을 한 공간처럼 사용해도 좋을 것 같다. 썸웨어처럼 오래된 고택에서만 즐길 수 있는 순간이 아닐까.
썸웨어의 가장 좋은 부분은, 시선을 어디로 가져가도 세월이 켜켜이 쌓인 부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된 느낌'이 아니라, 정말로 시간이 느껴지는 디테일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어서, 그냥 복도를 걸어 다니기만 해도 재미있다.
냉장고와 주방 정리를 잠깐 하고, 다른 방향의 복도를 따라 이동한다. 복도 좌측 2개의 문은 화장실이고, 정면으로 보이는 문은 1층에 있는 2개의 침실로 연결된다. 침실을 제외하면 썸웨어의 조도는 밝은 편은 아니다. 적당히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낮은 밝기 덕분에 오래된 집이 더욱 분위기 있고, 깊이감 있게 느껴진다.
시선을 멈추게 하는 화장실 천장의 클래식한 패턴 디자인은 난해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계속 쳐다보게 된다. 화장실은 세련되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오래되어서 좋을 것 없는 것 중 하나가 화장실이 아닐까.
복도 정면에 있는 문을 열면, 다시 2개의 문을 만날 수 있다. 좌측은 1층의 메인 침실이고, 우측은 손님방으로 쓰던 것 같은 작은방이 있다. 방과 복도로 연결되는, 붕 떠있는 이 작은 공간이 재미있어서 한참을 서 있었다. 아무 활용도가 없는 그냥 멍청하게 느껴지는 공간인데, 굳이 고쳐내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복도 방향의 문만 떼어내도 이렇게 바보 같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썸웨어라는 공간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조금씩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우측의 작은방. 썸웨어의 침실 중 가장 작은 공간이고, 난방이 가장 잘 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따뜻해서 그런가, 작지만 답답하지 않고 아늑하게 느껴졌다. 좌식 테이블도 있고, 무드 등도 있으니 혼자 조용히 책을 보거나, 차를 마셔도 좋겠다.
좌측의 메인 침실. 메인 침실은 독립된 화장실이 있어서, 커플이나 부부가 쓰면 좋을 듯싶다. 우측에 커튼 뒤에는 커다란 창이 있는데, 아침에는 꼭 커튼을 걷어보도록 하자.
현관 바로 좌측에는 티룸처럼 보이는 작은 좌식 공간이 있다. 다이닝 룸에서 나와 조금은 차분하거나 다른 소재의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기 좋은 공간인 것 같다. 다만, 현관 근처이기도 하고 완벽히 분리된 공간이 아니다 보니, 겨울에는 다소 쌀쌀하게 느껴진다. 무릎 담요 등을 챙겨 오면 좋겠다.
썸웨어는 목적에 따라 1층만 쓰거나, 1/2층 전체를 쓸 수도 있다. 1층만 예약한 경우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문을 잠가둔다고 한다. 2층에는 2개의 침실이 있으니 숙박 인원에 맞게 예약하는 편이 좋겠다.
2층으로 올라가는 문을 열면, 정면에 화장실이 있고 우측에 계단이 있다. 2층 침실을 위한 화장실인 것 같다. 삐거덕거리는 나무 계단은 가파른 편이다. 뛰지 말고 조심조심 올라가 보자.
계단을 오르면 2개의 침실이 기다리고 있다. 우측에 위치한 큰 방. 푹신한 더블베드가 2개 준비되어 있다. 친구들끼리, 혹은 여러 가족이 놀러 왔다면 아이들을 위한 방으로 써도 좋을 것 같다.
또렷한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향' 또한 중요한 요소가 된 것 같다. 썸웨어의 아이덴티티를 더욱 공고히 해주는 룸 스프레이가 1층과 2층에 구비되어 있다. 다이닝 룸에 몇 번 뿌려두고 왔다 갔다 하니, 좋은 향이 밤새 따라다녔다.
계단의 좌측에 위치한 작은방. 작지만 천장고가 높고, 창문도 있어서 답답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중요한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수험생을 위한 방 같은 느낌도 있다. 괜히 학구열이 생길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작은방 한편에는 작은 책상도 있다. 선반에는 가볍게 읽기 좋은 매거진이 몇 권 있고, 책상에는 간단한 글이나 낙서를 하기 좋은 필기구가 있다.
독특한 모양새의 연필 덕분에 할 말이 없어도 괜히 쥐어보고, 뭔가 적어보고 싶어 진다. 파라락, 넘겨보니 멋들어진 그림도 보이고, 예쁜 손글씨도 종종 보인다. 많은 분들이 썸웨어에서 좋은 추억을 만들었나 보다.
오래된 물건, 오래된 장소의 매력은 무엇일까. 한때는 오래된 것은 버리고 새것으로 채우는 게 유행이기도 했는데, 지금은 오래되어 보이는 모든 것이 멋진 시대다.
썸웨어는 아주 오래되었다. 오래된 집을 고쳐서 스테이로 쓰고 있지만, 너무 과한 터치를 입혀내진 않았다. 낡고 아귀가 잘 안 맞아 살짝 들어서 닫아야 꼭 맞게 떨어지는 나무 문, 스르륵- 저절로 흘러 내려가는 미닫이문과 창문들, 여기저기 깨진 유리를 붙이고, 성의 없게 대충 긁어내어 떨어진 스티커 자국도 있고, 성의 없이 덧칠한 페인트는 여기저기 튀어서, 마치 내가 발라놓은 게 아닌가 싶은 착각도 들게 한다.
분명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요소인데, 이상하거나 불편하거나 성의 없어 보인다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냥 멋있다고 생각된다. 그게 단지 지금의 트렌드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의도가 명확하고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시선 없이 있는 그대로 썸웨어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
딸가닥, 조작감이 좋은 스위치 역시 클래식하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오래된 스위치도 보이고, 오래되었지만 잘 쓸 수 있게 손을 조금 댄 스위치도 보인다. 괜히 스위치를 한 번 더 올려보고, 내려보고 한다. 딸깍, 딸각.
넓고 복잡한 공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재미는 있지만 조금 지치는 기분이다. 입에 뭔가를 집어넣을 시간. 다시 복도를 지나고, 문을 열고, 공간을 지나고, 다시 또 문을 지나면서 레이어를 걷어낸다. 그냥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것뿐인데도, 대단히 복잡한 일을 해낸 것 같은 기분이다.
한겨울의 쌀쌀한 공기에 따뜻한 것이 생각날 것 같아, 미리 나무사이로에 들려서 커피 드립 백을 집어왔다. 6개나 들어 있어서 남겠다 싶었는데, 집에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가만히 커피만 마시려니 조금 심심했다. 다이닝 룸 테이블에 놓여있던 책을 잠시 둘러보았다. '여행의 물건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이 많은 가볍게 읽기 좋은 에세이였다.
바쁘다는 핑계로 챙겨보지 못했던 독립 영화를 한 편 틀고, 역시 경복궁역 근처 바틀 숍에서 가져온 맥주를 몇 개 꺼내어 마셨다. 큰 테이블이라 참 좋았다. 먹다 치울 필요 없이 옆으로 조금 밀어 두고 새 잔과 맥주를 가져와도 공간이 충분하다. 물론, 다음날의 내가 고생을 조금 해야 한다.
1층 침실에서 잠을 청했다. 체크아웃 시간이 여유가 있어서 오랫동안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했다. 이젠 좀 일어나야지, 싶어서 햇빛 좀 쬐려고 커튼을 걷으니 예쁜 돌벽이 그림처럼 나타났다. 바닥에 앉아 벽을 보면서 커피를 한잔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제 하루 종일 밟고 다녔지만 아직도 삐거덕- 거리는 나무 복도의 소음은 어색하고 재미있다. 괜히 복도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왔다 갔다 해본다. 집이 넓으니 집 안에서도 산책이 가능하다.
잠이 좀 깬 것 같으니 아침의 썸웨어를 둘러보기로 한다. 밤새 켜져 있던 무드 등을 끄고 창문 가림막을 올려보았다. 어둡지만, 분위기가 괜찮다. 멍하게 앉아서 차 한잔하고 싶은 분위기다.
2층 작은방의 창으로는 중정을 내려다볼 수 있다. 밤새도록 책을 읽고 공부하다 보면, 등 뒤로 햇살이 떨어지겠지. 벌써 아침인가 싶어 1층을 잠시 내려다보고 다시 책을 마저 보거나, 1층에 내려가 물이나 한잔 마시면 되겠다.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잠깐 해본다.
2층 큰 방의 아침은 꽤 포근하게 느껴진다. 커다란 창이 있어 햇볕이 잘 들어서 그런지, 햇살을 맞은 오래된 나무가 예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덕분에 늦은 시간까지 침대에서 뭉개고 있기는 힘들겠다.
썸웨어는 18시 체크인, 14시 체크아웃이다. 덕분에 아침 시간이 여유롭고, 미리 준비를 잘했다면 점심도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밖에 나와 아침의 썸웨어를 한번 둘러보고, 어제 사둔 빵으로 간단히 식사도 해결했다. 조금 이르지만, 이제 돌아가 볼까.
약간 헛도는 손잡이를 잡고 힘을 주어 문을 밀어서 연다. 다시 살짝 들어서 닫아야만 꼭 맞게 닫힌다. 삐빅- 소리의 커다란 슬라이딩 철문의 도어록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멈춰진 시간 속 어딘가(somewhere)에서 지금의 서촌으로 돌아왔다.
EDITOR'S COMMENT
오래된 물건은 대부분 직관적이지만, 조금은 촌스럽게 생겼고 불편한 구석이 있다. 오래된 공간도 비슷한 감정이 있다. 선이 가는 대로 공간을 긋고, 잘라내고, 배분을 했다. 그러다 보니 과하게 넓어지기도 하고, 애매하거나 불편한 공간도 역시 존재한다. 필요에 따라 발코니도 터내고, 벽도 걷어낼 수 있는 지금의 시선으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이다.
다행히, 썸웨어의 의도는 아주 명확하게 방문객에게 전달된다. 벽돌집과 목조주택이 붙은 독특한 외형만이 아니라, 그 안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구조 역시 고쳐내지 않았다. 머무는 데 있어서 최소한의 불편함만 남도록 원형 그대로 고쳐내었다. 성의가 없음이 아니라, 너무나도 공간에 대한 배려심이 넘쳐나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싶다.
불편함이 매력적인 공간이다. 삐거덕 거리는 나무 바닥의 소음이나 딱 맞게 닫히지 않아 여기저기의 소음이 뒤섞이기도 하고, 방 한번 찾아가려면 복도와 문을 몇 개를 지나야 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부분이 디테일로 느껴지고, 재미있다고 받아들여진다.
썸웨어는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음을 선택했다. 오래되었고 불편하지만, 손대지 않은 그대로라 예쁘고, 친근하고, 마음이 계속 쓰이는 공간이었다. 문을 닫고 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여운이 길게 남는 하룻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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