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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길 곁 느린 공간 : 리재

스테이폴리오 '트래블'은 작가와 함께 폭넓은 스테이 경험을 소개하는 콘텐츠입니다.  



세상의

소리를 지우다


글ㆍ사진   정택준



프롤로그

1990년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동대문의 파급력은 꽤 컸다. 주말마다 부모님께 받은 용돈으로 동대문에서 옷을 사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었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동대문 거리에서 오뎅 한 꼬치의 행복을 느끼던 때가 있었다. 쇼핑몰 내에 작은 가게들 사이로 좁은 길을 걷는 게 그렇게 좋았을까, 가게마다 똑같은 비닐봉지에 담아주던 옷을 들고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는 지쳐 잠이 들기도 했다. 학창 시절의 전부였던 동대문이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내와 동대문에서 하루를 살기 위해 '리재'를 방문했다.




1. 광희문

북적이는 동대문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광희문을 만날 수 있다. 서울 도심에서 이렇게 조용한 골목이 있을까, 광희문 성곽길 언덕을 천천히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느리게 걷는 세상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숙소에서 문을 열면 성곽길이 바로 보이는 것도 새로운 느낌이었다.




2. 휴식

개인적으로 감성 숙소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감성이 어떤 것을 말하는지 내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을 때 기댈 수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헌데 리재는 감성 숙소라는 표현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외관에서 느껴지는 화려하지 않고 도시적인 느낌과 반대로 실내는 적당한 조도와 공기마저 나른한 분위기가 깔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방은 3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침대는 총 6개가 배치되어 있다.



거실을 중심으로 입구 첫 번째 방은 성곽길을 뷰로 품은 아늑한 방이었다. 자고 일어나 눈을 떴을 때 보이는 뷰는 어느 고층 뷰보다 편안한 하루의 시작을 선물하며, 늦은 밤 보이는 뷰는 나의 고된 밤을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 지켜주는 것 같았다. 안쪽 두 개의 방 중 왼쪽 방에는 빔프로젝터와 블루투스 스피커가 있어 정적인 하루에 즐거움을 안겨주고, 오른쪽 방은 오로지 휴식에만 집중할 수 있는 침대 하나가 배치되어 있다.




3. 집중

딱 적당한 크기의 거실에는 긴 바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가 배치되어 있다. 아내와 내가 가장 만족했던 공간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집마다 다르겠지만 큰 원형 테이블 혹은 바 테이블을 놓기에 쉽지 않은 집들이 많다. 식사하고, 책도 읽으며, 커피 한잔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게 거실의 가장 큰 목적이자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기능 아닐까. 어떠한 행동에 집중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동선과 가구 배치가 리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다.



주방은 ­일자형 키친으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상부 조명으로 어둡지 않은 주방을 유지할 수 있고, 커피머신 등 기본을 넘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주방 가전이 배치되어 있다. 더군다나 어디나 할 거 없이 큰 냉장고가 반갑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욕실 겸 화장실, 큰 세탁기가 눈에 들어온다. 화장실 공간도 좁지 않으며, 한겨울 피로를 씻겨주는 따듯한 온수도 문제없다.



동대문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도, 서울 속에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지금 이 현실도 감사했다. 매일 야근으로 밤늦게 퇴근하던 아내에게 새로운 하루가 필요했었고, 리재는 우리에게 새로움을 넘어 색다른 하루를 안겨주었다. 연말이 다가오기 전, 올 한 해를 아내와 돌아보며 얘기를 나눌 수 있어 좋았고, '리재'라는 공간에 머물렀기에 더 뜻깊은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4. 잠들지 않는 도시

동대문은 잠들지 않는 도시다. 이런 동네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잠들기 전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늦은 시간에도 성곽길 언덕길로 퇴근하는 사람들의 걸음이 유난히 많이 보였다. 언덕을 올라가는 걸음 속도는 느리지만, 집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빠르지 않을까.



거실의 바 테이블이 밤에는 더 감성 있는 매력을 보여준다. 각 방과 거실의 분위기가 하나의 감성으로 짙어지고, 평소 같으면 잠이 들었을 시간임에도 책을 읽는 아내에게 리재는 편안한 밤을 선사하고 있었다.




5. 하루의 끝

특별함보다는 편안함, 누군가가 한 번쯤 꿈꾸는 성곽길 뷰를 품은 숙소. 화려한 불빛의 동대문 곁에 이런 느린 공간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오늘 하루의 끝에는 세상의 속도를 신경 쓰지 않고, 리재의 속도에 맞춰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 글과 사진은 저작권이 있으므로 작가의 동의 없이 무단 복제 및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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