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시누이님이 딸과 사위와 함께 오셔
일박 이일의 여정을 조용히 함께 했다.
남편이 여섯 살 때 시집을 가셨지만
같은 동네에 살며, 아이였던 남편을 보살펴준
살가운 형님이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큰 아들이 신용 불량자로 지낸다는 것이었다.
대 기업에 다니며 남부럽지 않게 살던 조카였었다.
자식을 향한 노모의 출렁이는 가슴이 와닿았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파도가 때론 보호가 아니라
무게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걱정과 염려보다는, 다른 시선이 있었다.
그간의 삶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좋기만 한 것도 나쁘기만 한 것도 없다는 사실을.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바닥이 오히려,
날아오르는 출발점이 되기를
그저 축복하는 마음이 들었다.
관계가 바닥을 친 뒤에야 새로운 관계가 세워졌고,
존재감이 무너진 뒤에야
비로소 '존재'로 살게 된 시간들이
내 삶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바닥을 친다는 것,
그 자체로 삶의 경이를 품고 있음을
모른척할 수 없었다.
오래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라는 문장이
내 가슴을 사로잡았었다.
오랜 세월 그 의미를 흠모했다.
'날개'라는 단어만으로도 난 충분히 매혹되곤 했다.
그토록 날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날아오를지, 온몸이 달아오르던 시절,
날개가 없어 날지 못하는 줄로만 알았었다.
꿀 접시의 끈적거림에 날개가 젖어,
다시 날아오르지 못하는 날벌레들,
그 모습이 바로 나였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세상이 온몸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끈적거림이 떨어져 나가자,
세포들이 알알이 빛나며 가벼워졌다.
이윽고, 파득거리는 날갯짓이 시작되었다.
존재는 오대양 육대주를 너머 무한대와의 접속으로
스스로 자리를 찾아 날기 시작했다
조용히 마음을 모은다.
추락은 끝이 아니라
삶이 다른 방식으로 시작되는 지점임을
나는 이미 여러 번 살아보았기 때문이다.
조카의 이번 추락이
오히려 숨어있는 자신의 날개를 알아차리는
시간이 되기를
조용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