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화유예: 작은 화병에 풀꽃들이 며칠 더 머무르다.
가운데 가장 크고 노란 민들레
핑크빛이 도는 흰 꽃잎이 세련된 데이지
숨어있는 옅은 보라색의 작은 광대나물꽃
별모양의 작고 짙푸른 하늘색 큰봄까치꽃
보라색 포도송이 같은 무스카리 또는 포도히아신스
“앗, 개나리가 폈어.”
아침을 먹다 말고 아내가 울타리 쪽을 가리켰다.
고개를 들어 본 그곳에는, 붉은색 계열의 우리 집 가든 창고와 회색톤의 이웃집 창고가 나란히 보였다. 그 사이를 구분해 주는 키높이 정도의 녹색 차광막 너머로, 이른 아침 햇살을 받은 사철나무 이파리들이 잔잔한 바람에 설렁설렁 흔들리고 있었다. 평화로운 아침 풍경이었지만, 아내가 말한 '개나리꽃'은 정작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그 개나리는 담장 너머 옆집 창고의 노란 기둥이었다. 안경을 쓰지 않은 아내의 눈에는 그것이 바람에 흔들리는 개나리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오해할 만도 했다.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일어나서는 안경을 가져다 씌워주었더니, 자기가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차린 아내가 한바탕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가 보았다.
봄을 맞아 창고 기둥과 문 테두리를 노랗게 칠한 모양이다. 개나리가 필 때도 되었는데 싶어 마당을 조금 더 둘러보았다. 그러다 잔디 사이에서 작고 하얀 풀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며칠 동안 해가 나고 날이 따뜻하더니, 밤사이 마당에 하얀 꽃들이 내려앉은 모양이다.
“아, 이제 봄이 왔구나.”
작년 봄 어느 따듯했던 날이 떠올랐다.
풀꽃들은 저렇게 여기저기 피나 싶다가도 어느새 잔디를 덮어 버린다. 이곳에서는 그래서 그냥 두면 자기네들 잔디로 넘어올까 봐 이웃들이 한마디 한다는 얘기를 아내가 들었다고 했다. 들꽃을 좋아하는 아내는 그대로 두고 싶었지만, 남들의 곱지 않은 시선은 또 싫었다. 결국 꽃들이 시들 때까지 더 보려던 생각을 접고 더 퍼지기 전에 내게 정리해 달라고 했던 것이었다.
그날 나는 잔디밭을 정리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잔디와 함께 사라져 버리기에는 내게도 꽃들이 예뻤다. 그래서 마당에 피어 있던 여러 가지 풀꽃들을 하나 둘 길게 길게 끊어 모아서는, 주먹만 한 화병에 꽂기 시작했다.
잔디를 깎으라는 ‘명령’이 떨어진 지 꽤 되었는데도 기계 소리가 들리지 않자, 한 번 더 재촉하려고 지하에서 세탁기를 돌리다 말고 아내가 마당으로 올라왔다. 파이널 터치가 되지 않아서 좀 아쉬웠으나,
아내는 그 조그만 꽃병을 보고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녀의 두 가지 상반된 민원을 내가 한 번에 해결했던 셈이었다. 그날은 사랑을 듬뿍 받았다.
문득 그때 그 꽃병이 궁금해졌다.
가족 단톡방에는 내가 찍은 건 물론이고 아내가 찍어 올린 사진들도 여러 장 있었다. 지금 다시 보아도 그때만큼이나 예쁘다.
이번 봄에도 이 하얀 풀꽃을 시작으로, 겨우내 남쪽으로 갔던 우리 마당의 꽃들이 하나둘 돌아오겠지.
노란색 기둥을 보고 이미 개나리를 우리 마당으로 불러들인 아내. 잔디와 함께 사라질 마당의 풀꽃이 조금 더 머물기를 바라며 작은 화병으로 초대한 나.
우리는 나름의 방식으로 다가올 봄을 기다리고, 떠나가는 것들에 또 그렇게 아쉬움을 표한다.
글을 발행한 후 @고다혜 작가님 댓글을 읽고 영감을 받아 제목을 ‘풀꽃이야기’로 바꾸고, 그에 맞게 풀꽃들의 이름도 찾아서 글머리에 추가하였습니다.
가운데 가장 크고 노란 민들레
핑크빛이 도는 흰 꽃잎이 세련된 데이지
숨어있는 옅은 보라색의 작은 광대나물꽃
별모양의 작고 짙푸른 하늘색 큰봄까치꽃
보라색 포도송이 같은 무스카리 또는 포도히아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