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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다 May 06. 2020

나타샤가 남긴 선물 <길상사>

역사 속 공간 이야기






불기 2564년 4월 30일 부처님 오신 날은 조금 특별하게 보내기로 했다.

4월 30일이었던 부처님 오신 날 행사는 5월 30일로 연기 었지만 미뤄진 기간 동안 코로나 19 극복을 위한 특별 기도 기간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서울시 성북구에 있는 길상사 또한 이번 부처님 오신 날을 우리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보내기로 했다.

길상사의 소식과 템플스테이에 대해 알고 싶다면 여기로




길상사는 앞서 언급했듯이 서울시 성북구에 있는 사찰이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산속 깊이 있는 사찰과는 사뭇 다른 곳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에 억불정책으로 인해 절은 산으로 들어가게 되어 현재 남아있는 유명한 사찰들은 대부분 산속에 있는 형태가 되었다. 그렇지만 길상사는 1997년에 세워졌으므로 이러한 이야기와는 거리가 아주 멀다.

이 사찰은 어떻게 도시 속에 세워지게 되었을까?

그 이야기는 김영한(김자야)이라는 여인에게서부터 시작된다.

김영한(1916~1999)




김영한은 15살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으나 남편이 우물에 빠져 죽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그 후 시댁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온 김영한은 기생의 길을 갈 수밖에 없게 된다.

가무와 시, 그림에 재능이 뛰어난 기생이었던 그녀는 23살에 함흥 영생 여고보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영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1936년 운명적으로 만난다.

백석(1912~1996)




백석은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고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오늘부터 당신은 내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 우리 사이 이별은 없어요" (세상에...)

                                                                                                     

김영한이 서울로 돌아가자 백석은 아예 그녀 때문에 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와서 조선일보에 근무한다. 그리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리고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3년간의 동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고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켰으나 신혼 첫날밤부터 도망치기를 여러 차례 하면서 부모에 대한 효심과 여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 갈등하다가 이를 벗어나기 위해 만주로 도피하자고 제의한다.

그러나 그녀는 백석의 장래를 걱정하여 함흥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결국 1939년 백석은 홀로 떠난다. 

백석은 만주를 유랑한 후 광복이 되자 함흥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김영한은 서울로 떠난 후였고, 그 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백석은 북한에서 김영한은 남한에서 영원한 이별을 맞게 된다.

1980년대 중반, 삼수군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백석과 가족들의 사진




당대 최고의 유행남이자 모던보이였던 백석 시인에게는 언제나 여자들의 구애가 끊이질 않았는데 그는 맘에 드는 여인에게 자기가 맘에 드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그는 김영한에게 이백의 시 자야오가에서 따온 이름인 '자야(子夜)'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백석은 사랑하는 자야를 위해 시를 한편 남기기도 했는데, 그것이 바로 너무나도 유명한 시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다.                                                                                    


그녀는 그 후 대원각을 물려받아 운영하였는데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서울 3대 요정으로 키웠다.

크게 성공한 그녀는 1997년 2억 원을 들여 백석 문학상을 제정하였고 같은 해 7000여 평의 대원각 대지와 건물 40여동등 1천억 원대의 부동산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해 길상사를 설립한다. 그런 그녀에게 길상화라는 법명과 108 염주 한 벌이 내려진다. 그로부터 1년 후 1999년 11월 13일 오후 길상사를 산책하던 김영한 할머니는


"내가 죽으면 화장해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주세요."


라고 했고 바로 다음날인 1999년 11월 14일, 그녀는 108 염주를 목에 건 채 83세의 나이로 운명한다. 한 달 후 12월 14일 길상사에 눈이 내리자, 스님들은 그녀의 재를 길상사 앞마당에 뿌린다.

대원각 시절의 본체




그녀가 죽기 열흘 전 한 기자와 나눈 대화를 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천억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그게 무슨 소용 있어."

기자는 또 한 번 어리둥절했다.

"다시 태어나신다면? 어디서?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 태어나서 문학할 거야."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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