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인 토론

by Quirky

희선은 늘 무언가를 채우고 싶어했다. 대화를 나눌 때마다 자신이 비어 있다는 걸 느꼈다.

영화, 미술, 음악, 문학...무엇이든 배워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는 중’이었다.

최근엔 영화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매달 '죽기 전에 봐야 할 영화 1001편' 목록 중 한 편을 골라 감상하고 토론하는 모임이다. 이번 달의 영화는 거스 반 샌트 감독의 ‘엘리펀트’다.

“이 영화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받은 수작이에요.”

모임장의 목소리는 약간 들떠 있었다.

“우리 모임 멤버 분들은 대부분 좋아하실 거예요.”

“21세기 최고의 영화 중 하나죠.”

B가 곧장 받아쳤다. 그는 언제나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희선은 B의 여유와 자신감이 담긴 그 표정이 내심 부러웠다.

희선은 그동안 모임장이 선택한 영화들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기대했다. 희선의 빈 무언가를 채워 줄 수 있는 그런 영화 말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가해자 두 놈은 사이코패스다. 지루하다. 화질은 구리다. 다큐인지 영화인지 모르겠다. 안경 쓴 여자애만 불쌍하다.’

이게 칸 영화제 수상작이라니, 희선은 믿기지 않았다.

모임 당일, 모임장이 진지한 얼굴로 운을 뗐다.

“이 영화는 호불호가 분명합니다.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많았죠. 다양한 의견이 나올 것 같아요.”

그때, 평소 거의 말이 없던 J가 입을 열었다.

“전 이 영화 완전 별로던데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가해자 애들은 그냥 사이코죠. 영화 자체는 비윤리적이고.. 롱테이크는 지루하고, 홈캠으로 찍은 것 같이 화면은 촌스럽고. 베토벤의 월광소나타는 왜 틀어요? 너무 뻔하잖아요.”

모임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B가 옅은 웃음을 띤다. B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는 그렇게 단선적으로 보진 않았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월광 소나타는 단순한 삽입곡이 아니라, 비극을 예고하는 리듬이에요.

알렉스와 에릭이 나치 영화를 볼 때 카메라는 TV가 아니라 창밖을 비추죠. 그들은 폭력을 소비하지 않아요. 단지, 존재하죠.”

그의 말이 끝나자, 방 안엔 ‘지적인 공기’가 돌았다. 희선은 순간 자신이 그 공기 밖에 서 있는 사람이 된 듯했다.

“그럼, 희선님은 어떻게 보셨어요?”

모임장의 시선이 희선을 향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음...저는 이 영화가 폭력의 원인을 설명하기보다, 그 공기를 포착하려 한 시도라고 생각했어요. 롱테이크는 사건의 비극성을 강조하기보다, 오히려 일상의 무표정을 보여주는 장치 아닐까요? ‘다큐’같은 질감은 관객에게 불편함을 주지만, 그게 현실감을 높이는 방식이기도 하고요. 안경 쓴 여자아이는 이유 없는 희생의 상징처럼 느껴졌어요.”

말을 마치자 모임장은 환하게 웃었다.

“역시 희선님, 깊이 있는 시선이에요.”

B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정확해요.”라고 덧붙였다.

희선은 마침내, ‘지적인 토론’의 중심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그런데 J가 그녀를 보고 있다.

조용히,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옅은 웃음을 띠며,

소리 없는 웃음. 크크큭.


*토론 내용의 일부는 '평론가 전찬일과 정성일의 엘리펀트 대담'에서 참고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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