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전도연은 우아했고 김남길은 따뜻했다
푸르스름한 배경을 보여주며 시작해 시종일관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이야기해나가는 영화 <무뢰한>은 살인자 박준길(박성웅)과 그의 여자 김혜경(전도연), 박준길을 잡기 위해 혜경에게 접근하는, 범인을 잡기 위해선 어떤 수단이든 가리지 않는 형사 정재곤(김남길)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영화는 무채색의 화면들로 이루어져서 축축하고 눅눅한 느낌을 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이 등장하는 시간은 주로 해질녘이나 새벽녘이기 때문이다. 박준길과 김혜경이 각각 다른 때에 방에 불을 켜려 하는 혜경과 재곤에게 "불 키지 마" 라는 대사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두 사람 모두 어두운 상황에 처해 있음을 나타내 주는 장면 같았다. 이렇듯 보통 사람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빨간 매니큐어를 바르고 등장하는 그녀는 마카오 단란 주점의 마담이다. 그런 그녀를 미행하고, 그녀의 집에 도청장치를 설치해 매일 밤 김혜경의 집 앞에서 잠복을 하는 정재곤의 모습은 박준길을 잡으리라는 의지를 보여준다. 도청되고 있는 스피커 속에는 박준길과 김혜경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재곤은 볼륨을 낮추고 밥을 먹는다. 이 장면을 보며 앞으로 보여질 정재곤이라는 캐릭터는 어떨까 궁금증을 유발했다.
박준길을 놓치고 김혜경에게 더욱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마카오 단란 주점의 영업사원으로 들어간 재곤은, 준길의 감방 친구인 이영준으로 위장을 해 그녀 곁을 맴돌며 혜경과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하며 지내게 된다. 그런 재곤에게 혜경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입만 열면 거짓말이네요." 라고 말하면서 그가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안다. 그렇지만 크게 신경은 안 쓰는 듯 재곤에게 솔직한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둘이 함께 하며 혜경의 밀린 외상값을 받으러 가는 장면을 두고 전도연은 이 장면이 김혜경의 가장 강한 부분을 드러낸 것 같지만 실은 가장 약한 부분을 드러낸 것이라 말한다. 그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를 대하는 다른 남자들의 모습은 무례하기 짝이 없다. 혜경은 그동안 이렇게 숱한 남자들의 무례함을 겪어야만 했음을 보여준다. 그런 상황에서도 감정을 절제시키는 듯한 그녀의 모습이 마음이 아팠다. 많은 시간을 함께 다니던 영준이 잠시 자리를 비우면 혜경은 그를 찾곤 한다. 이렇게 둘 사이에는 어떠한 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남자인 준길에게 이용당하는 듯 보이는 혜경의 모습은 안타깝게만 보인다. 자신에게 빚을 떠안겨 주고 살인을 저지름으로써 혜경을 떠나있는 준길은 혜경에게 조그마한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혜경이 준길에 대한 마음을 거둘 수 없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기보다는 그저 붙잡아 두고 싶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외로움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렇게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박준길과는 달리 혜경이 힘들 때 자신의 곁에 있어 준 재곤이기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재곤과 혜경의 감정이 더해지고 재곤의 몸에 난 상처를 보게 되는 혜경은 "상처 위에 상처, 더러운 기억 위에 더러운 기억을 얹고 사는 거지" 라며 그의 상처를 보며 자신의 상처를 떠올린다. 이렇게 관계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를 위한다고 하는 것들이 실제적으로 그녀에겐 기쁨을 주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관계가 되어버린다. 두 사람의 엇갈리는 갈등은 결국 상대방의 감정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긋나버리고 만다. 사실은 처음부터 위태로워 보인다. 형사와 살인자의 여자와의 사랑이라니. 억지로 끼워 맞추려도 안 맞춰지지 않는가. 정재곤의 신분으로서가 아닌 이영준의 신분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도 그 이유에 있는 것 같다. 또한 그가 혜경에게 갖던 감정은 혜경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마담 김혜경 속의 의외의 모습 때문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가장 슬펐던 장면은 "나랑 같이 살면 안 될까?" 라는 재곤의 질문에 진심이냐며 그를 보는 그녀의 눈빛, 그런 그녀에게 재곤은 "그걸 믿냐"며 넘겨 버린다. 후에 그녀는 다시 한번 재곤에게 묻는다. "나랑 같이 살고 싶다고 한거 거짓말이었죠?" 그러나 그는 다시 말한다. "내 말 믿지마." 그런 그에게 내던지는 "아냐, 진짜 같아"라는 그녀의 대답은 거짓도 믿어버릴 것 같은 모습이다. 거짓으로 점철된 썩은 줄이라도 놓치기 싫은 그녀의 마음인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점점 비극으로 치달으며 꼬여버리는 이 이야기는 도대체 영화가 어떻게 끝날까 하는 궁금증을 유불한다. 이제야 끝나는 구나 생각했을 때 다시 한 번 나락으로 떨어트리면서 공허함을 느끼게 해준다. 영화 처음부터 모든 것에 무심해 보였던 재곤의 표정은 이런 모든 상황들에 등을 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었는데, 이는 영화의 결말에 다다를때에야 그 이유를 보여준다. 혜꼉의 입장에서 재곤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생각한다면 마지막 그녀의 선택도 이해못할 것만은 아니다. 다만 둘만의 사랑의 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았기에 닿지 못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지독히 슬프지만 신파적이지 않는 이 영화는 하드보일드 멜로의 특성을 잘 나타내 주었다. 그럼에도 전도연은 우아했고 김남길은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