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타인의 불행을 보고 안심했던 일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이를테면 순간적인 사건들에 감정이 휘둘렸던 날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찰나의 기쁨, 찰나의 분노, 또는 찰나의 슬픔은 대개 매우 주관적이어서 대상을 편협한 시각으로 보기 쉬워진다. 그렇기에 순간적인 감정을 다시금 살펴보는 일이 필요했다.
'그럴 수 있지'를 반복하다 보니 객관적인 관점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문제에 대해 냉철하게 바라보기 위함으로는 불필요한 되뇜이었을까?
내 삶에 대해 상회하는 일은 일상을 넘어 살에 새겨져간다. 보이지도 않는 그 상흔을 숨기려고 나를 꽁꽁 싸매다 보면 나는 어느새 작은 거인이 되어 있었다.
그것보다 더 큰 아픔을 바라보려 하는 일, 그것보다 더 큰 희망을 바라보려 하는 일이 부질없음을 깨달으니 내가 있는 곳이 사라졌다. 나만 붕붕 뜬 채로.
감정이 앞서기 이전에 합리적인 의심을 하자고 다짐했는데, 나는 누구에게나 낯선 사람이 되어버렸다. 도저히 만져지지 않는 흔적들을 만지려고 팔을 뻗었을 때, 그 끝에 누군가 서 있기는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