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이란 시간만을 놓고 보았을 때 그 시간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지만, 그녀가 나와 함께 해 주었던 5년이란 시간은 나에게 있어서 만큼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지인과의 식사 자리에서 처음 만난 그녀는 사소한 농담에도 쉽게 얼굴이 빨개지는 사람이었다. 나의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였고, 나의 경솔한 말들에도 쉽게 미소 지어 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의 그런 점이 좋았다. 말도 안 되는 농담에도 고개를 숙이고 쿡쿡대며 웃던 그녀는 내가 좀 더 다가가려 하자 약간의 거리를 두곤 했었다. 적극적인 내가 부담스러운 것인지 애초에 내가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그렇게 그녀와 나는 한참의 시간을 지나 보냈었다.
서로 알고 지낸 지 몇 개월 후에 드디어 그녀와의 둘만의 약속을 잡을 수 있었고, 그날 나는 하얀 튤립을 한 다발 사서 약속 장소에 나갔다. 그녀가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손에 쥐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을 때의 그녀의 표정을 아직도 난 잊을 수가 없다. 찰나의 눈빛의 흔들림과 그 사이로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나는 보았었다. 내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기 전에 그녀는 그런 적 없다는 듯 나를 보며 웃어 보였다. 우리는 그렇게 첫 식사를 하고 비에 젖은 거리를 걸었다. 내가 보드라운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었을 때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말없이 한참을 걷고 나서 나는 고백을 했다. 그녀는 조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고 나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난 그녀가 꽃다발 챙기는 것을 잊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밥을 먹었던 곳에 가서 그녀가 앉았던 옆 의자에 쓸쓸하게 놓여있는 꽃다발을 들고 집으로 왔다. 그녀처럼 참 깨끗해 보이는 꽃이었다. 꽃병이 없어 우유갑에 임시로 물을 넣고 꽃을 꽂아두었다.
그 후로 며칠이 지나 우리는 연인이 되었고 다른 연인들처럼 불같은 사랑을 했다. 나는 그녀와의 미래를 그렸다. 그녀를 닮은 아이, 그리고 행복한 우리. 하지만 그녀는 점점 지쳐가는 듯했다. 그녀를 정말 행복하게 해주었다고 자부해 왔는데, 그녀는 나를 만나고부터 오히려 더 병들어 가는 것 같았다. 때로는 대화 중에 내가 그녀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러야 내 이야기에 집중했고, 작은 일에도 쉽게 울며 처음 만난 그날처럼 내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극복할 수 있다 생각하며 보낸 시간이 5년. 어쩌면 좀 더 일찍 들었어야 했던 말이지만 만난 지 5년이 되던 무렵, 나는 그녀에게서 이별의 말을 들어야 했다. 내가 잘할 게라며 무릎 꿇고 매달렸다. 나 같은 남자는 어디 가도 만나지 못할 거라며, 나처럼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말없이 서 있는 그녀 앞에서 나는 엄마에게 버림받는 아이처럼 한참을 울며 매달렸다. 나를 두고 그녀가 갔다. 모든 눈물이 마를 때쯤에야 나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그 길 위에선 정말 많은 비가 내 몸을 두드렸다.
오늘처럼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창문을 열어놓고 비에 젖은 땅 냄새가 좋다고 말하던 그녀가 생각이 난다. 나에겐 역하게 느껴졌던 비의 냄새가, 젖은 그 땅의 냄새가 그녀의 냄새인 것만 같아 비가 오는 날엔 창문을 꼭 열어놓게 되었다. 그녀가 비 냄새를 머금고 돌아왔으면 좋겠다. 역하디 역한 비의 냄새를 품고 돌아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