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의 시야,유한의 발길

절대와 상대를 사유하다

by Surelee 이정곤


나는 몇 해 전 전라남도 영광군으로 귀촌했다.
바다가 가깝고, 산도 너른 이곳은 나에게 낯설면서도 오히려 오래된 묵은지처럼 친숙한 곳이다.
아침에는 새소리에 마음을 열고, 낮에는 흙 냄새를 마시고, 저녁이면 게으른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늦은 밤,
나는 집 뒷편의 데크에서 밤하늘을 올려보다 별들과 시선을 마주쳤다.
사방은 고요했고, 머리 위로는 별들이 쏟아질 듯 반짝이고 있었다.
그 순간, 문득 하나의 질문이 깨어났다.
“저 수많은 별들은 지금도 존재하는 걸까?
아니면 이미 사라진 별의 흔적을 내가 보고 있는 걸까?”
과학자가 아니라도 다 아는 사실 하나가 머리속에 떠올랐다.
우리가 바라보는 별빛은 대부분 수천만 년 전, 혹은 수억 년 전에 떠난 빛이다.
그 별은 이미 사라졌고, 우리는 과거의 잔광을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이 아름다움은 진실인가, 아니면 허상인가?
바로 그 순간, 내 안에서
절대와 상대라는 두 개념이 고요히 문을 열기 시작했다.


절대 ― 닿을 수 없는 고요


‘절대’란 변화하지 않는 진리다.
늘 그러하며, 시작도 끝도 없이 존재하는 것.
플라톤은 이를 ‘이데아’라 불렀고,
기독교는 신(God)이라 부른다.
불교는 ‘공(空)’ 속에서 절대성을 이야기하고,
수학은 ‘무한대(∞)’로 이를 상징한다.
하지만 절대는 결코 누구의 손에도, 누구의 눈에도 완전히 쥐어지거나 비춰진 적이 없다.
언어 바깥에 있고, 인식 너머에 머문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그 개념을 떠올리고,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도달할 수 없기에 오히려 나를 계속 걷게 만든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절대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내 마음 안에서 매 순간 깨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대 ― 질문하는 존재의 조건

오전 내내 정원 가꾸기를 마치고 영광읍내의 농협 하나로 마트에 들렀다가 유리문에 비친 내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나는 내가 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세계가 나를 비추고 있구나.”
상대란 바로 그런 것이다.
나는 전부를 알 수 없지만,
그 모자란 인식 덕분에 한 방향을 갖게 된다.
내가 만약 모든 것을 다 아는 존재라면,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고,
아무런 길도, 여정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유한한 인간으로서의 나,
알 수 없는 것을 향해 질문하는 ‘존재’인 내가 오히려 복된 것이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사유하게 만들고, 걷게 만들며, 하늘을 올려다보게 만든다.


길에서 만난 이야기

불갑 저수지의 수변공원 내 둘레길 걷기를 마치고 귀촌 선배인 도연 선생을 만났다.
그는 나를 보고 반갑게 웃으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젊은 날, 불갑사에서 수도승의 옷을 입고 절대의 진리를 찾아 수 많은 길을 다녔지. 만나는 사람마다 질문을 던지고 하루하루 기록했어.”
나는 물었다.
“그럼 결국 그 진리를 찾으셨나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찾았지. 결국엔 집으로 돌아가
‘절대는 내 안에 있었다’고 선언했거든.”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요, 이미 내 안에 있었다면
왜 굳이 수행의 길을 걸으신 거예요?”
그는 천천히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절대는 늘 있었지.
하지만 나는, 나를 찾으러 길을 걸었어.”
그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절대는 항상 거기 있지만,
그것을 깨닫는 ‘나’는 여정을 통해서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사유는 멈추지 않는다

내가 이곳 영광에 내려와 산다는 것은 어쩌면 절대를 향한 아주 소박한 걸음일지도 모른다.
절대와 상대는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는 절대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
절대는 상대를 의미 있게 만든다.
별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별을 바라보는 나의 눈을 느낀다.
이 감각, 이 생각, 이 자리.
그것이면 충분하다.
절대는 그 자리에서 늘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끝>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