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와 김치, 그리고 냉장고
최근 유럽에서는 한국 김치냉장고가 인기 수직상승 중이다.
치즈 덕분이란다.
김치냉장고 속으로 치즈 문화가 담기는 모양새다.
수천 가지의 치즈들...
치즈의 풍미도 다채롭다.
브리는 부드러운 흰 망토를 두르고 와인의 속삭임을 즐기는 프랑스 귀부인 같다. 겉은 단정하지만, 속은 은근한 유머와 깊이를 품은 사람처럼 크리미하고 풍부하다.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는 이탈리아의 장인처럼 단단하고 질서 정연하며, 요리에 살짝 뿌려졌을 뿐인데도 전체의 맛을 이끄는 리더 같은 존재다.
체다는 영국 시골에서 태어난 믿음직한 친구처럼 고소하고 단단하며, 오래될수록 성숙한 향과 지혜를 품는다.
그리고 고르곤졸라는 첫 만남엔 다소 당혹스럽지만, 곁을 내어줄수록 중독적인 매력을 지닌 예술가 같다.
이처럼 각기 다른 땅과 기후, 사람들의 손끝에서 태어난 치즈들은, 그 자체로 작은 세계이며, 시간의 향기와 문화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야기꾼들이다.
사막 한복판에서 태어난 치즈의 기원은 우연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호기심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우연처럼 생긴 작은 변화가 인류의 식문화를 뒤바꾼 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치즈가 또 다른 발효음식과 낯선 공간에서 만나고 있다.
바로, 김치냉장고 속의 치즈다.
치즈의 고향인 유럽에서, 김치의 고향 한국에서 건너온 김치냉장고를 들여다 치즈를 보관하고 있다니 정말 흥미롭다.
김치냉장고가 치즈를 품었다고?
이것은 단순한 기술의 수출이 아니라, 문화와 철학이 교차하는 놀라운 장면이다.
치즈는 서양을 대표하는 발효음식이고, 김치는 그 종주국이 대한민국이다.
둘은 ‘썩음’과 ‘숙성’ 사이의 얇은 경계에 존재한다.
사람들은 흔히 상한 음식을 경계하지만, 발효는 그 반대편에서 ‘자연스러운 변화’를 긍정하는 철학이다.
썩어서 변질된 악취가 아니라, 숙성되어 품격을 더한 풍미의 깊이.
발효는 시간과 기다림, 그리고 미세한 조건의 조화를 받아들이는 지혜다.
그런 의미에서 김치냉장고는 흥미로운 철학적 공간이다.
그 안에는 온갖 음식이 잠들어 있다.
먹다 남은 빵, 찌개, 굴비, 고사리, 말린 고구마순, 그리고 김치와 치즈.
이 냉장고는 단순한 저장고가 아니라, ‘기다림의 시간’이 잠복해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늘 합리적이지 않다.
맛이 살짝 이상하다 싶으면, “상했나?” 하는 불신이 먼저 앞서고, 정확한 판단보다 빠른 폐기가 이루어진다. 이런 판결에는 3심제가 없다.
의심이라는 옐로우카드 하나면 음식은 바로 퇴장당한다.
그 순간, 우리는 잊는다.
치즈가 처음 태어난 그 기적도, 그렇게 버려질 뻔했던 우유 덩어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가 냄새나 질감을 기준으로 판가름하고 버리는 그 ‘애매한 상태’가 사실은 발효의 문턱일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음식이든, 사람의 관계든, 혹은 인생의 어느 실패든, 조금 낯설고 불완전한 상태를 ‘기다리는 시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거기서 숙성된 풍미가 피어날 수도 있다.
우연히 태어난 치즈처럼, 우직하게 익어가는 김치처럼.
치즈, 김치를 만나다 ― 문화의 숙성
치즈는 시간과 자연, 우연의 손끝에서 태어난 선물이다.
김치는 인간의 손길과 계절의 흐름, 기다림의 미학이 깃든 음식이다.
둘은 발효의 철학을 품은 형제이며, 오늘날 냉장고라는 공간에서 조우하며 인류의 미각뿐 아니라 삶의 태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무르익기 전의 가능성을 버리고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연을, 변화의 조짐을, 불완전한 것을 두려워하는가?
김치냉장고에 잠든 치즈 한 조각은 이 질문에 대한 한 조각의 답처럼 보인다.
자연과 인간의 협업, 기다림과 신뢰, 변화에 대한 관용.
이 모든 것을 품은 그 공간은 단순한 냉장고가 아니라,
발효의 철학이 숨 쉬는 서늘한 서재일지도 모른다.<2편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