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색된 색종이와 GPU 이야기

나와 너의 GPU

by Surelee 이정곤

퇴색된 색종이와 GPU 이야기



강남역 8번 출구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오성빌딩.

2001년 초반 난 그곳에서 벤처기업을 창업했다. 음성인식 웹브라우저, 이미지 검색로봇, 게임 등 각종솔루션을 개발하면서도 GPU가 오늘날 AI시대의 기반 기술이 될거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그때 기억은 오래된 색종이처럼 빛이 바랬지만 개발자들과 밤을 새우며 배달의 기수’, ‘사이버농장’ 같은 게임들을 만들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앞선 탓에 결국은 시장의 파도 속에서 휴지조각처럼 사라졌다.
형광등 불빛 아래, 커피 향에 뒤섞인 키보드 소리보다 저성능 GPU의 버벅거림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의 GPU는 지금처럼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다.
집집마다 컴퓨터에 막 GPU 기능이 탑재되기 시작하던 시기,
그래픽이 조금만 복잡해져도 컴퓨터는 숨이 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작은 칩 위에 세상을 그리려 했다.
캐릭터가 달리고, 하늘이 움직이고,
픽셀 하나에도 꿈을 담았다.


GPU가 하는 일

GPU(Graphic Processing Unit), 그래픽 처리 장치.
비유하자면, GPU는 컴퓨터 속 그림 그리는 화가다.
CPU가 한 문제씩 차근차근 해결하는 꼼꼼한 수학자라면, GPU는 수천 명의 화가가 동시에 그림을 그려내는 팀과 같다.
그래서 GPU가 있으면 컴퓨터가
게임, 영상, 사진 같은 걸 빠르고 부드럽게 보여줄 수 있다.


AI 시대의 GPU ― 배우고 생각하는 두뇌

이제 GPU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손이 아니라 AI의 두뇌가 되었다.
AI는 두 가지 일을 한다.
바로 학습(Learning) 과 추론(Inference) 이다.
학습은 데이터를 보고 배우는 일이다. 예를 들어 수많은 고양이 사진을 보며 “이게 고양이구나”를 깨닫는 과정이다.
추론은 그렇게 배운 것을 바탕으로
“이 사진에도 고양이가 있다”라고 판단하는 일이다.
GPU는 바로 이 두 과정을 모두 빠르게 도와준다. 수많은 데이터 속에서 배우고, 순식간에 답을 찾아내는 AI의 뇌 속에는 항상 GPU가 있다.


그 중심에 선 이름, 엔비디아(NVIDIA)

AI시대의 주역으로 떠오른 기업이 바로 엔비디아(NVIDIA)다.
원래 게임 그래픽을 위해 GPU를 만들던 회사였지만, 남들이 보지 못한 길을 먼저 보았다.
반면에 나는 GPU가 단지 그림을 그리는 장치가 아니라 세상을 배우고 추론하는 두뇌가 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망각했었다.
그러나 엔비디아는 GPU를 AI가 배우고 생각하기 좋게 바꾸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자율주행 자동차, 음성 인식, 번역기, 이미지 생성 AI까지 모두 엔비디아의 고성능GPU 위에서 돌아가고 있다.
이제 GPU는 인류의 상상력을 계산하는 엔진이 되었고, AI 시대의 심장이라 불린다.
그래서 기업과 국가들이 앞다투어 GPU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GPU가 곧 지능의 속도와 깊이를 결정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때의 연필, 지금의 심장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비록 벤처기업가였으나, 미래를 내다보지 못했고, 저성능 GPU로 낙서하는 수준의 서툰 작업만을 반복했었다.
지금의 AI처럼 ‘학습’과 ‘추론’을 반복하는 혁신적 발상을 하지 못했다.
그 시절 나에게 GPU는 게임을 완성하기 위한 작고 단순한 연필이었고, 지금의 GPU는 세상을 그리는 거대한 심장이 되었다.
기술이 바뀌어도 본질은 같다.
GPU의 계산 속에는, 인간의 배움과 상상의 흔적이 있다.
퇴색된 색종이처럼 희미한 나의 추억 속에서도 그 불빛은 여전히 깜빡이며 살아 있다.
그 작은 빛이 오늘날의 AI를 밝히는데 일조했다면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내 과거의 꿈을 다시 불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