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가락을 물고 사는 남자

젖가락 이야기

by Surelee 이정곤

젖가락을 물고 사는 남자



요즘 나는 나무 젓가락을 이빨로 물고 웃음을 연습 중에 있다.

컵라면을 먹을 때 사용하던 것, 특별할 이유가 없지만 굳이 젖가락을 골랐다.

그 감촉이 차갑지도, 날카롭지도 않은 나무의 결이 내가 의도하는 바와 가장 어울리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젓가락을 입에 문 채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웃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웃는 얼굴의 형태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내 삶속에 파고든 파킨슨병은 내몸을 조용히, 그리고 조금씩 바꾸어 놓는다.

어느 날 갑자기 내몸을 무너뜨리기 보다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가 나였던 방식들을 다른 자리로 옮겨놓는다.

손이 먼저 느려지고,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내 얼굴의 감각이 서서히 둔감해져 간다.

거울 속 나는 예전보다 덜 놀라고 덜 기뻐하고 덜 웃는 사람처럼 보인다.

웃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웃는 길이 이전처럼 자연스럽지 않을 뿐인데도 마음은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 얼굴이 둔감해질수록 내마음은 다급해진다. 외면의 둔감이 내면의 민감을 재촉한다.

이러한 아이러니에 나는 나 자신에게 종종 낙심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驅蹴)하듯 내 몸의 경직이 내 마음의 안정을 위협한다.

왜 이렇게 굳어버렸을까,

왜 이렇게 낯설어졌을까.

얼굴이 굳으면 마음까지 굳은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표정이 줄어든 자리에 의욕과 온기까지 함께 빠져나간 것만 같아서 오히려 내몸은 나사 풀린 시계처럼 멈춤의 시간에 갇혀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내 마음을 설득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자고 문득 생각했다.

괜찮다, 긍정하자, 웃어 보자, 그런 말들은 오히려 마음을 더 깊은 곳으로 숨게 만들었다. 대신 얼굴에 먼저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젓가락을 입에 문다.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간다. 광대 근육이 오랜만에 호출을 받은 것처럼 조심스럽게 반응한다.

나는 웃고 있지는 않지만 웃음이 지나간 자리 근처에는 다다르고 있다는 걸 느낀다.

이런 나의 결행은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괜찮아 보이기 위한 사회적 웃음도, 타인에게 예의를 갖추는 배려 차원의 웃음도 아니다. 오직 나 자신에게 보내는 신호다.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웃음이 사라진 얼굴은 여전히 나의 얼굴이다. 하지만 웃음으로 가는 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웃음은 늘 감정의 결과라고 믿어왔지만 이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웃음은 어쩌면 감정이 아니라 몸과 마음 사이를 오가는 통로인지도 모른다.

웃음의 통로는 기쁠 때 열리는 자동문이 아니라 억지라도 문을 열면 기쁨이 스며드는 수동문 구조랄까.

젓가락을 문 채로 가만히 앉아 있으면 몸이 먼저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다.

크게 웃지 않아도, 환하게 드러내지 않아도 아주 낮은 음성으로 신경과 마음이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여전히 많이 웃지 못한다.예전처럼 소리 내어 웃지도 않는다.

하지만 웃음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다만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웃음은 이제 소리가 아니라 감각이고, 표정이 아니라 방향이다.

세상을 향해 활짝 여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해 아주 조금 기울이는 일이다.

이 작은 결행이 언젠가 다시 어색하지않은 미소로 이어질지 아니면 이 자체로 오래 머물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다.

웃음을 잃어가면서도 나는 여전히 웃음 쪽으로 몸과 마음을 열어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방향만 잃지 않는다면 오늘의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덜 굳어 있는 셈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무 젓가락을 입에 문다.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아무도 요구하지 않는 웃음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나 자신에게 선물한다.

젖가락은 내게 웃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