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은 유효한가
오늘 아침, 매일 봐도 색다른 반끄릇 비치의 일출을 스마트폰에 담느라 역 근처에서 매일 아침 열리는 모닝마켓에는 결국 가지 못했다.
허둥지둥 아침을 때우고 해먹에 누워 한참을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냈다.
몸을 일으켜 앉는 순간, 바닥에 개미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해먹 주변에 음식 찌꺼기를 흘렸던 모양이다.
태국에 머무는 동안 일상의 많은 순간마다 나를 괴롭히는 존재들이 있다.
개미, 모기, 그리고 파리.
사실 모기와 파리는 그다지 대적의 대상이 아니다.
나는 유독 개미와 자주 전쟁을 치른다.
개미라는 미개한 생명체는 생각보다 집요하다.
음식 찌꺼기가 묻은 잠바를 테라스 기둥에 걸어 두었더니 어느새 개미떼가 옷을 점령해버렸다.
내 실수라는 걸 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너무도 흔하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신발 속으로 침투한 개미 한 마리가 내 발가락을 물었다.
개미는 이렇게, 아주 사소하고 반복적인 방식으로 나의 일상을 침범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생명 존귀의 대상이 어디까지인지 잘 모르겠다.
‘나’라는 주체를 공격하는 대상을 적(敵)으로 인식하고 대응하는 것이 정말 잘못된 일일까.
존중받아야 할 생명과
제거해야 할 위협 사이의 경계는
도대체 어디에 그어져야 하는가.
나는 여러 차례 개미들의 집단 공격에 대응해 그들을 몰살시킨 적이 있다.
그 순간, 나는 윤리학자가 아니었다. 철학자도, 사유하는 인간도 아니었다.
그저 공격받는 존재로서 살아남기 위해 반응했을 뿐이다.
그래서 오늘은 개미를 그저 관찰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 불편한 질문을 끝까지 따라가 보기로 했다.
개미를 통해 생명의 실존을 묻고, 더 정확히 말하면 존엄이라는 개념이 언제 작동하고 언제 붕괴되는지를.
개미에게도 생명이 있는가.
이 질문은 우문처럼 보인다.
생명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이 질문은 답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나는 생명의 진위가 아니라 존엄의 조건이 궁금해졌다.
‘개미도 생명이다’라는 명제를 제쳐두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단정하기보다 존엄이 왜 필연적으로 요청되는지, 그리고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나만의 방식으로 비추어 보고 싶어졌다.
이 질문은 곧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개미의 생명도 존중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모든 생명은 존중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시작은 자연적인가, 인공적인가.
이 지점에서 개미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인공적 지능, AI의 문제로 확장된다.
개미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질서 있게 움직인다.
AI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판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존엄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유에서 비롯되는가, 아니면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가.
만약 AI가 인간을 위협하거나 대적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존중해야 할까. 아니면 제거해야 할까.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이
인간을 종속화하거나 적대하는 수준에 이른다면 그것은 더 이상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괴멸시켜야 할 적이 된다.
개미와 AI는 규모도, 지능도, 영향력도 다르다.
그러나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다.
둘 다 스스로를 존엄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존엄은 언제나 그들을 대하는
인간의 판단 속에서만 발생한다.
나는 개미를 죽일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죽이기도 했다.
그것은 생명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공존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개미의 생명을 재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존재로 반응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나의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모든 생명은 존중받아야 하는가,
가 아니라 존엄은 언제까지 유효한가.
존엄은 무조건적인 명제가 아니다.
그것은 위협 앞에서도 유지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관계에서만 성립한다.
내일도 해먹 아래에는 다시 개미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AI 역시 인간 앞에 같은 질문을 들이밀 것이다.
그때 우리는 존엄을 말할 것인가, 아니면 생존을 선택할 것인가.
두 번째 개미 이야기는 그 질문을 남긴 채 여기서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