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지금 발광이 필요해

두 발광의 틈새에서

by Surelee 이정곤


난 지금 발광이 필요해



세상에는 두 가지의 발광이 있다. 동명이의랄까.

하나는 빛을 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미치는 일이다.

나는 요즘 그 둘이 너무 닮아 보여서,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건 아닐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틈에서 한 번 놀아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발광(發光)은 말이 좋다.

안에서 에너지가 생겨나 스스로를 밝히는 상태로 이해된다.

누가 비춰주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의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는 빛의 실체다.

사람들은 그걸 재능이라 부르고, 성장이라 부르고, 때로는 “요즘 참 빛난다”라는 칭찬의 말로 포장한다. 안전하다. 박수받기 좋다

반면 발광(發狂)은 위험하다.

안에 있던 것이 한계를 넘는 순간, 질서 밖으로 튀어나온 상태.

감정이든 생각이든 억눌렸던 무엇이든, 더는 내부에 머물 수 없어 밖으로 쏟아지는 일, 차고 넘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런 광기 앞에서 한 발 물러선다. 선을 넘었다고 섣불리 말하고, 미쳤다고 부른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두 발광은 모두 안에서 시작된다. 참다가, 쌓이다가, 어느 순간 더는 안에 둘 수 없어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걸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 뿐이다. 빛은 관리 가능한 폭발이고, 광기는 관리 불가능한 폭발이라고 규정한다.

같은 에너지인데, 어디까지 허용되느냐의 문제다. 조명으로 쓰이면 빛에 의한 발광이고, 경보음이 되면 광기어린 발광이다. 나는 이 구분이 늘 의심스러웠다.

과연 빛은 언제나 단정했고, 광기는 언제나 무질서했을까.

우리가 열광하는 빛나는 어떤 순간들도 사실은 미침 직전의 상태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우리가 쉽게 미쳤다고 말하는 장면들 중에는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빛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원래 미침은 '~에 이르다', '도달하다'라는 뜻을 반영한다. 그렇게 '빛의 발광'은 '미침의 발광'과 맥이 통한다.

그래서 나는 ‘틈’에 관심이 간다.

너무 정제되지도,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도 않은 상태.

빛으로 불리기엔 거칠고, 광기로 단정하기엔 살아 있는 상태.

그 아슬아슬한 간극에서 사람은 가장 자기답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늘 그 틈에서 태어났고,

철학도 그 틈에서 버티며 질문을 만들었다.

질서 안에만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완전히 벗어나면 말이 사라진다.

말이 살아 있으려면 반쯤은 미쳐 있어야 하고, 반쯤은 빛나야 한다.

“나는 지금 발광이 필요해”라는 말은 그래서 두 방향을 동시에 품고 있다고 믿는다.

조금 더 나다워지고 싶다는 말이면서, 조금쯤은 선을 넘어도 괜찮겠다는 자기 허락의 여유다.

그건 파괴 선언이 아니라 환기 요청에 가깝다. 마치 닫힌 방에서 창문을 여는 일처럼 말이다.

나는 이제 발광을 하나로만 이해하지 않으려 한다.

빛만 요구하는 사회도 숨 막히고, 광기만 낭만화하는 태도도 위험하다.

대신 그 사이, 빛이 미침으로 오해받고, 미침이 빛으로 변모하는 순간을 오래 바라보고 싶다.

어쩌면 삶의 중요한 전환점들은

늘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 순간을 넘지 못해

평생 반사광으로만 살았고,

누군가는 너무 멀리 가버려

아무도 읽지 못하는 언어가 되었다.

나는 지금 그 경계에 서 있다.

아직은 말로 쓸 수 있고,

아직은 돌아올 수 있는 거리에서 있다.

빛과 광기 사이, 빛이 나는 발광과 미침이 있는 발광 사이의 틈에서 나는 잠시 미쳐보고, 조금 더 밝아져 보려 한다.

그러니 이 발광은 소란이 아니라 신호다.

나 아직 살아 있다고, 안에 있는 것이 아직 뜨겁다고 발광한다.

지금의 나는 빛을 내기 직전의 상태이거나, 미치기 직전의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그 둘 사이에서만 나는 진짜 나에 가까워지니까 괜찮다.

그래서 난 오늘도 발광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