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잡의 역설

방치된 혼잡, 멈춘 마음

by Surelee 이정곤

문득, ‘혼잡’이라는 단어가 내 방 안에 가득하다는 자각이 들었다.
바닥엔 아무렇게나 던져진 옷가지들, 책상 위엔 다 읽지 못한 문서와 메모지, 마시다 만 커피잔 하나가 어정쩡하게 남겨져 있다.
그 어지러운 풍경 속을 걸어 다니면서도, 내 안의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는 기분이었다.
얼마 전, 우연히 본 영화 속 장면이 떠올랐다.
아빠와 딸이 방치된 거실을 두고 언성을 높이던 순간.
“좀 치우고 살아.”
그 짧은 대사가 내 안에서 오래 울렸다.
그건 단지 어질러진 공간에 대한 말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안의 방치된 어떤 것들이 그 말에 걸려 흔들렸다.
문득 생각했다.
“나는 어쩌다 너저분한 책상 위에 쌓인 회피와 방치 속에서 살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 기저에는 무엇이 있었던 걸까.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 다급하게 움직이는 길 위의 속도.
그 ‘빠름’은 부지런함의 또 다른 이름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그것은 정리할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 서두름,
그리고 그 서두름에 뒤섞인 태만과 회피의 결속이었다.
속도는 점점 빨라지는데, 내면은 그만큼 굳어간다.
공간은 더이상 숨 쉬지 않고, 마음은 흘러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혼잡이라는 상태의 본질이다.
기묘한 역설이다.
불편해서 정리를 미루고, 미루다 보니 더 불편해지고,
그러다 결국 그 불편함에조차 익숙해진다.
정돈된 삶이 오히려 더 낯설고,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아이러니.
방치는 중독된다.
편하게 살고 싶어 방치했는데,
그 끝엔 가장 불편한 일상이 놓여 있다.
그러다 문득, 마음속을 스치는 질문 하나.
“정돈된 삶은 과연 자유로운 삶일까?”
무질서야말로 나다운 방식이 아닐까?
정리된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나는 때때로 내 감정과 더 멀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정리하지 못함’의 저편에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자리하고 있다.
“언젠가 한 번 크게 정리해야지.”
그 다짐은 늘 내일로 미뤄지고,
정리는 결국 내 삶과, 내 기억과,
무엇보다 나 자신과 마주 앉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정리는 단지 물건을 치우는 행위가 아니라,
삶의 무게를 되짚고 마음을 정돈하는 나 자신과의 정면 대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방치된 서랍 안에서 오래된 생일축하 카드 하나를 발견한다.
잊고 있던 딸의 손글씨, 웃으며 써 내려간 계획표,
그리고 다 마시지 못한 채 식어버린 꿈.
그것들은 멈춰 있던 내 시간을 다시 흐르게 만든다.
정리는 과거와의 작별이고,
선택은 미래를 향한 초대장이다.
물론, 모든 무질서가 나쁜 것은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책상, 스티브 잡스의 벽면,
시인의 흩어진 노트들.
그 어지러움 속에는 창의의 씨앗이 숨어 있다.
혼돈 속에도 질서는 존재하고,
어지러움 속에서도 어떤 조화는 피어난다.
정리되지 않은 공간 속에서
때로는 뜻밖의 영감이 피어나고,
그 혼잡을 순환의 에너지로 삼아 살아내는 삶도 존재한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내 방 안의 혼잡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 안에는 아직 정리되지 못한 나의 마음,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어 하는 나의 속도,
그리고 그 혼잡 너머,
조용히 나를 기다리는 새로운 시작의 공간이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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